제목 | 독립운동가 신현상 선생 | ||||
---|---|---|---|---|---|
작성자 | 예산문화원 | 등록일 | 2001-11-22 | 조회 | 1216 |
첨부 | |||||
신현상 선생의 호는 일연이라 하고 본관은 평산이며 명문대가로 알려진 장절공의 후예이다.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있었으며 의를 신봉하여 동네 사람들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을 예견했 다.1924년 독립의 열망과 뜻한 바 있어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 부 서기로 근무하며 국립 상해 노동대학에 다니기도 하였다. 이 때 국내 정세는 1919년 기미 독립운동이 일제의 총칼에 무산되 고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국내의 활동에서 제약을 받게 되었 다. 이에 동포가 많이 살고 있는 간도와 연해주 등지에 항일 독 립운동의 거점을 이룩하려고 곳곳에 조국광복을 염원하는 독립운 동 기지가 서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연은 대한민국 임시정 부 민당 요원으로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귀국후 합덕 정미소를 운영하던 최석영 동지와 함께 쌀 공출시 받는 환증을 이용하여 장항선 일대 각 역마다 공출용 쌀을 화차 에 실었다는 지략을 써서 환증을 받아내는 방법으로 호서은행에 서 거금 5만 8천원(쌀 한 가마에 6원정도 했음)을 인출하는데 성 공, 만주에 도착하니 임정과 독립운동단체 모두가 크게 고무되 어 대일항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30년 3월에 상해로 출발하여 가던 중 유기석 동지의 주선으로 텐진 주재 일본 영사관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이에 사용할 권 총을 구입하던 중 밀고자가 있어 그 뒤를 쫓던 일본 경찰에게 체 포되었다.어렵게 구한 자금을 사용하기 일보직전에 계획은 수포 로 돌아가고 이 사건으로 5년 여의 옥고를 공주 형무소에서 치루 었다. 해방후 심산 김창숙 선생의 천거를 받아 환국 임시정부 백범 김 구 주석의 판공실장으로 타고난 지략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또한 3의사 봉안 위원회를 결성하여 해외에 방치되어 있던 윤봉 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수습, 효창원에 안장하는 일 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반민특위 검찰관으로 선임되시어 친 일파를 색출, 옥석을 가려 응징하는 일에 진력을 다하였고, 1950 년 대한 청년단 공주군 단장으로 2대 민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으 나 남북 협상파는 공산당이라는 모략으로 낙선 후, 같은 해 6· 25사변이 발발하여 피난 중 공주에서 공산당에게 피납되어 대전 형무소에서 학살당하시었다. 가족은 선생의 시신도 찾지 못하여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감되었던 음력 8월 14일을 선생의 기일로 하고 고인의 넋을 애도하고 있다. 그 후 백범 김구의 후손 김 신을 위원장으로 하여 일연선생 기념 사업회를 설립하고 1975년 6월에 향리인 신례원 용곡산 자락에 추모비와 일연각을 건립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한 일연 신현 상 선생의 생전의 뜻을 기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