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조선중기의 문신 조익 선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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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예산문화원 | 등록일 | 2001-11-22 | 조회 | 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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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풍양 호 : 포저·존재 별칭 : 자 비경, 시호 문효 활동분야 : 정치 주요저서 : 《포저집(浦渚集)》,《서경천설(書經淺說)》 선조 12년에 태어난 선생은 자는 비경 호는 포저이다. 선조 25년 에 문과에 급제한 후 호당에 있었고 1609년 병조좌랑을 거쳐 수 찬에 재직중 정인홍 등이 이언적, 이황의 분묘배향을 반대하자 탄핵하다가 고산도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웅천 현감 이 되었다. 계축년(1613) 폐모의 의논이 일어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신창 현 도고산 밑에 초막을 짓고 경사 연구에 골몰하였다. 그로 인하 여 예산과 인연이 맺어진 것으로 묘소가 예산 신양면 신양리에 있다. 1623년 인조대왕이 즉위하자 맨 먼저 기용되어 이조좌랑이 되었 다. 이 때 김육이 제창한 대동법의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다. 효 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이 되고 인조의 행장찬집청 찬집관을 겸한 뒤 좌의정에 올랐다. 이 해에 이이, 성혼의 문묘배향을 주장하 는 상소를 올렸다가 허락되지 않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선생이 세 살 때 바둑돌을 배열하여 괘를 만드는 놀이를 하니 보 는 사람이 놀랐고 다섯 살 때는 이웃노인이 옷을 벗어 한 곳에 놓고 선생더러 지켜보라 한 다음 저물게야 돌아와 보니 선생은 그때 까지도 지키느라 떠나지 않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조정에 들어선지 50여년 동안 가난한 선비와 같이 평생을 살았고 우국충군의 생각이 떠날 때가 없었다고 한다. 윤씨 부인 이 돌아가고 검추공만이 살아 90수를 누렸는데 거동이 불편하자 음식과 용변 등 모든 수발을 직접 하였다. 상을 당하니 음식을 입에 넣지 않기를 3일, 미음만 마시며 수저를 들지 않기를 3개 월, 3년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다. 선생은 선도, 음율, 병법, 복서 등의 서책도 한번 보기만 하면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성리학의 대가로 경전의 교훈을 독실하게 믿었다. 평생 책을 손에서 놓는 일이 없었으며 항상 말하기 를 ''성현을 배우고자 한다면 사서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했 고 ''공자의 뒤에 군유의 글을 모아서 대성한 분은 주자이니 그 공이 맹자보다도 많다.''하였다. 그의 문장 지음에 있어서 이치가 통하는 것만을 취했고 기교를 일삼지 않았으며 붓가는 대로 썼다. 그의 문집 15권, 용, 학, 인 득 각1책, 심법12장 등 수십책이 집에 간직되어 있다. 효종 6년(1655)3월 10일 세상을 뜨니 춘추 77세였다. 신양면 신 양리에 선생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묘 주변이 지방문화재로 지 정되어 있으며 포저공의 유서와 그의 아들인 송곡 조복양의 문집 이 판각으로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각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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