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朴憲永, 1900 ~ 1955.12.5]
개요
공산주의 운동가. 본관 : 영해(寧海) 국적 : 북한 활동분야 : 혁명운동 출생지 : 충남 예산(禮山)
본관 영해(寧海). 충남 예산(禮山) 출생. 1919년 경성고보(현 경 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서 1921 년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에 입당, 그 해 고려공산 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년 1월 김단야 ·임원근과 함 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 였고, 4월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하여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체 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그 후 1925년 4월 18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이 때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여 그 책임비서가 되 었다. 1946년 12월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을 조선공산당에 흡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였으며 초대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지지 등 공산주의 활동을 지휘하다가,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48년 9월 남 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을 지닌 채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4월 남 ·북노동당이 합쳐 조선노 동당으로 발족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인 김일성의 밑으로 지위가 전락하였다. 그 후 군사위원회 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위에 있었으나 1953년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8월 3일 체포되었다. 그 후 평북 철산(鐵山)에 감 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5일 반당 ·종파분자 ·간첩 방조 ·정부 전복음모 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 되었다.
[ 그림설명 - 여운형과 밀담을 나누고 있는 박헌영(왼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