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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혼 [成渾, 1535~1598]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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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혼 [成渾, 1535~1598]
작성자 예산문화원 등록일 2004-07-15 조회 465
첨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창녕(昌寧) 
호 우계(牛溪)·묵암(默庵) 
별칭 자 호원(浩源) 시호 문간(文簡) 
출생지 서울 순화방(順和坊) 
주요저서 《우계집》 《주문지결(朱門旨訣)》 등 

본문 
본관 창녕(昌寧). 자 호원(浩源). 호 우계(牛溪)·묵암(默庵). 
시호 문간(文簡). 좌의정이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파평(坡平) 윤씨. 서울 순화방(順和坊)에서 태어났으 
며, 1539년 파산(坡山) 우계로 이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 
다. 

17세에 신여량(申汝樑)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진사·생원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백인걸(白人傑) 
에게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 
(李珥)와 도의지교를 맺었다. 선조 초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 
봉(參奉)·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 
문에 전념하였다. 

동서분당기에는 이이·정철(鄭澈) 등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 
였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 
판에 등용되었으며, 이때 북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 
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 
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이 되었으며, 1594년 좌참찬으 
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 
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李 
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 
(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이는 그의 학문을 평가하여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외손인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 
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조헌(趙憲)·황신(黃愼)·이귀(李貴)·정엽(鄭曄) 등 
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인 윤선거,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기축옥사에 관련된 연유로 삭직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복관되었다. 좌의정에 추증, 15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 
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 
주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 《우계집》과 저 
서에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