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만 [李曼, 1605~166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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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예산문화원 | 등록일 | 2004-07-15 | 조회 | 4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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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전주 별칭 자 지만(志曼) 활동분야 정치 본문 본관 전주. 자 지만(志曼).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으로 1628 년(인조 6) 생원시를 거쳐 같은 해에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예조 좌랑 ·정언 ·지평 등을 거쳐 진출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수찬으로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척화론을 폈다. 1639년 이후 효종대를 거쳐 현종대에 이르도록 삼사와 이조, 각 도의 관찰사, 호조 ·공조 등의 관직을 두루 거치고 1663년(현 종 4)에 한성부우윤에 이르렀다. 그 직전에는 진하겸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도 다녀 왔다. 1631년 왕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성군(仁城君) 처벌을 놓고 서인 ·남인이 분란을 벌였을 때 국왕의 방침에 반대하여, 처벌하자고 주장하고 인성군을 두둔하는 정온(鄭蘊)을 공격한 것 은 서인의 입장에 선 것이었다. 실무에 밝았으나, 전라도 관찰사로서 금지된 곳에 농장을 설치하 여 치부했다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상인의 불법 거래를 막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난 일도 여러 차례였다. 특히 1650년(효종 1) 조선이 일본을 빙자하여 군비를 확충한다 고 청나라가 의심하고 협박하여 조정이 위기에 빠졌을 때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일본의 상황을 보고한 일을 책임지고 해명하 지 않아 그 유죄 여부가 조정의 논란이 되어 영변에 유배된 적 도 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벼슬을 유지한 것은 송시열(宋時 烈) 등이 그를 두둔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