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정만석 [鄭晩錫, 1758~18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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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예산문화원 | 등록일 | 2004-07-15 | 조회 | 7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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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온양(溫陽) 호 과재(過齋) ·죽간(竹磵) 별칭 자 성보(成甫), 시호 숙헌(肅獻)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관서신미장계(關西辛未狀啓)》 본문 본관 온양(溫陽). 자 성보(成甫). 호 과재(過齋) ·죽간(竹磵). 시호 숙헌(肅獻). 1780년(정조 4) 사마시에 합격, 83년 문과에 급제하고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거쳐 1785년 전적(典籍)이 되었으며, 이어 대간직(臺諫職)을 역임하고 여러 차례 암행어사 로 나갔다. 1801년(순조 1) 교리로 정조사(正朝使)를 따라 서장 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와서 장령(掌令)이 되고 누차 왕명으로 경상우도 ·전라도 ·충청도를 안렴(按廉)하였다. 1805 년 동래(東萊)부사로 가서 뇌물을 받고 쓰시마섬[對馬島]과의 통 신서계(通信書契)를 위조한 역관(譯官)을 주살하였다. 이어 도총부부총관 ·형조참판 ·우승지 ·좌승지를 역임한 뒤, 1810년 공조참판으로서 앞서 부총관 시절 도총부의 초기(草記) 를 변통한 일이 있다 하여 무주(茂朱)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홍 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위무사 겸 감진사로 파견, 181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피폐된 민생을 잘 수습하여 생사당 (生祠堂)이 세워졌다. 1818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서 병조 ·공조 ·이조 ·형조의 판서를 역임, 1829년 우의정에 올랐다가 이듬해 중추부판사로 전임하였다. 시문에도 능한 청백 리(淸白吏)로서 편서에 《관서신미장계(關西辛未狀啓)》가 있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