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국사당보와 노씨부인에 얽힌 전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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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예산문화원 | 등록일 | 2001-11-22 | 조회 | 13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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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천지가 창조되던 때의 일이다. 무한천변인 벼룩부리에서 한 노파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상류로부터 산 하나가 둥실둥실 떠 내려 오더니 빨래터 앞에 와서 닿 았다. 할머니는 "이거 귀찮은 것이 왔군." 하고는 빨래 방망이 로 밀어냈다. 산은 둥실 쭉 밀려가더니 대안에 가서 멈췄다. 이 산이 바로 오늘의 예산군 오가면 신장리에 있는 국사봉이었다 한 다. 약 200년 전인 정조 2년(1794년)봄 철 복숭아꽃, 살구꽃이 아름 답게 피던 무렵 오가면 노계리(오촌리)의 광산 김씨 댁에서는 큰 경사가 있었다. 장남 만진이 장가를 든 것이다. 시집을 온 광주 노씨 새댁은 첫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하얀 도포를 입은 신선같은 노인이 나타나더니 "나는 이 곳 들을 맡 고 있는 신령이다. 너는 복이 많은 여인이니 장차 부귀를 누리 게 되리라. 내 오늘밤에 눈이 오게 할 것이니 그 눈을 따라 수로 를 내도록 하라. 그러면 너희 집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흥황 할 것이다." 하고는 사라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야밤 이었다. 혼례를 치른 18세 새댁은 김씨 댁에 온 첫날밤인지라 수 줍어서 망설였지만 하도 기이한 꿈이라 옆자리에 깊이 잠든 낭군 을 깨우고 꿈 이야기를 하였다. 신랑은 날 밝기를 기다려 이른 새벽 대문 밖에 나가보니 과연 마 당 앞에서부터 광야 속으로 하얗게 한 줄기로 서리가 내려 있었 다. 그는 마굿간을 달려 갔다. 집에서 기르는 조랑말을 타고 그 서리자국을 계속 달려가 보았다. 급기야 오가들이 끝나는 국사 봉 아래 무한천변 에 다다른 것이다. 신랑 김만진은 부모의 승낙을 얻은 다음 대동회의를 열어 보 막 는 일과 수로 내는 일을 협의하였다. 온 농민이 이 새 농토 개척 에 찬동 하였다. 오가평야의 다른부락에서도 동조하고 나섰다. 이리하여 다음 해 이른 봄부터 대역사는 시작되었다. 수로로 소 요되는 부지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제공하였다. 부자집인 김씨 댁에서는 노씨 부인이 앞장서서 매일 점심과 술을 냈다. 이로부 터 부인이 앞장서서 매일 점심과 술을 냈다. 이로부터 원리벌 옥토는 해마다 더 넓게 개척이 이루어졌으니, 200년 전 우리 예산이 오가 주민들이 노씨부인을 중심으로 자기 희생과 봉사와 협동과 지혜로써 새마을 운동을 성취한 셈이다. 현재의 예당 저수지의 자리는 옛 국사당보가 모체가 된 것이고 그 당시의 십리가 넘는 수로는 현재도 예당 농지개량 조합의 수 로로 이용되고 있다. 그 후 신장리 사람들이 마을 앞 국사봉 기 슭을 지나는 수로를 트집잡아 분규를 일으켰다. 때마침 오가역 말 일흥역을 지나던 암행어사가 이 문제를 잘 해결하여 국사보 를 동리 농민들에게 돌려주니, 오가에서는 암행어사 즉 "나라"에 서 내려주신 "보"라 하여 이때부터 국사당보라 하였다. 신랑 김만진은 그 후 열심히 공부하여 대과에 급제하고 공직에 있으면서도 국사보를 막던 때나 다름없이 성심으로 근무하더니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