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독립운동가 김좌진(金佐鎭)[1889.11.14~1930.1.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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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홍성문화원 | 등록일 | 2001-11-23 | 조회 | 1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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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본관 : 안동(安東) 호 : 백야(白冶) 별칭 : 자 명여(明汝)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충남 홍성(洪城)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본관 안동(安東). 자 명여(明汝). 호 백야(白冶). 충남 홍성(洪 城) 출생. 형규(衡奎)의 2남이다. 부유한 명문대가 출신으로 15 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 다. 1905년(광무 9)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 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 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융희 1)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 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 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 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서북학회의 산하 교육기관인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 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 월 간 복역하였고,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 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 (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 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 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 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 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 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 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 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 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 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 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 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 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 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 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 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 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 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 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 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의 김일성(金一星)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 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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