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김복한 | ||||
---|---|---|---|---|---|
작성자 | 홍성문화원 | 등록일 | 2004-07-09 | 조회 | 420 |
첨부 |
![]() |
||||
|
|||||
안동인(安東人) 김복한의 자는 원오(元五) 요, 호는 지산(志 山)이다. 문충공 상용(文忠公 尙容)의 10대 손으로 철종(哲宗) 1년(1860) 7월 24일 홍주읍 조휘곡(朝輝谷, 지금의 소향리 향 산 동)에서 출생하였다. 6세되는 정월에 외간상을 당하고, 7세 되는 11월에는 내간상을, 다음 해 에는 조부상을 당하였다. 33 세에 별시문과 (別試 文科)에 합격하여 교리(校理)에 임명되었 고, 다음해에는 사서(司書), 통정(通政), 대사성(大司成), 형 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승지 (承旨)에 올랐으나 왜적이 내정 에 손을 뻗치자 갑오(甲午)년 4월에 벼슬을 버리고 시골집 으 로 돌아왔다. 을미(乙未)년 8월 역신(逆臣)과 왜적이 공모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이설, 안 병찬(安柄璨), 이근 주(李根周)등과 의논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당시 홍주목사였 던 이승우 (李勝宇)에게 체포되어 홍주옥(洪州獄)에 투옥되었 다. 다음해 정월 경성 감옥으로 이송되어 고등재판소에서 10년 의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종(高宗)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병신 (丙申)년 3월에 성균관장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고, 정유 년(丁酉年) 3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또 한 나가지 않았다. 무술(戊戌)년 국사가 절망상태에 이르자 세 상과 인연을 끊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문도 (門徒)가 수백명 에 이르렀다. 을사(乙巳)년에 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역신들 을 처단하고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상소를 한 뒤 투옥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그해 12월 30일에 석방 되었다. 병오(丙午) 년 민종식(閔宗植)이 의병을 일으킨 데 관련한 혐의로 11월에 체포되어 공주 경 무청에 다시 경성 경무청에 이송되었다가 석방 되었다. 정미(丁未)년 10월에 민심을 선동하 였다는 혐의로 체 포되어 공주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교자(轎子)가 청 양 구수리 고 개에 이르자 왜경이 대갈일성(大喝一聲)에 정교 (停轎)를 명하고 곤봉으로 무수히 난타한 다 음 발포하려는 순 간 한인순경 정원조(鄭元朝 法東面人)의 급구(急救)로 명중을 면하였다. 이 때에 모진 고문으로 수족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 여 식사와 대소변도 다른 사람의 힘을 빌 려야 하였다. 기미(己 未)년 전국 유림의 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장 서(長書)를 보내어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90여일 만에 석방되 었는데 이때에 그가 옥중에서 읊은 옥중시가 있 다. 人皆欲死 死 我獨無其術 擬刃勿莫持 欲經足豈立 親屬樂不求 溺水尤無設 惟 當餓而死 少學淸聖節 신유(辛酉)년에는 문도의 수가 늘어나 인 지제(仁智劑)라는 강당을 새로 세우고 후진 양성 에 전념하다 가 갑자(甲子)년 3월 29일 65세를 일기로 다난하였던 생애를 마 쳤다. 그는 마지 막으로 “왜적이 망하거든 나의 영혼 앞에 왜 가 망했다는 사실을 전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기 고 세상을 떠났 다. 그의 묘는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에 있고, 1973년 제자들 과 홍성군수 조영 호(趙塋鎬)의 성의로 군비를 투입하여 추양사 (秋陽祠)라는 사우를 세우고 영정을 봉안하였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