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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상(田雲祥) 게시판 상세보기

[홍성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전운상(田雲祥)
작성자 홍성문화원 등록일 2004-07-09 조회 403
첨부 gif 홍성문화원.gif
전운상은 홍주 영장으로 있던 전시원의 아들로 자는 용백(龍伯)
이요, 호는 자천(紫泉)이라 하였다. 숙종 갑술년 3월 23일 출
생하였는데 용모가 출중하고 문무를 겸한 인재로서 정유년에 무
과 에 급제하여 경자년에 선전관이 되었다. 당시 대신이었던 김
창집의 추천으로 비변랑을 겸직 하였다. 얼마 안 되어 판관에
서 도총도경력(都摠都經歷), 내금장 겸 내승(內禁將 兼 內
乘), 훈련어영천총(訓鍊御營千摠), 부총관금위중군(副摠管禁衛
中軍), 금위별장(禁衛別將) 등 여 러 내직을 역임하고 정평,
초산, 통진, 해미, 선천, 장단, 죽산, 춘천, 남양, 회녕, 평
양중군, 전라좌수사, 경상좌도병사, 황해병사, 삼도통어사 등
의 외임을 치렀다. 그가 외임으로 있 을 때에 농사에 각별하게
관심이 있어 농사를 권장하고 뽕나무 심는 것을 권장하였다. 흉
년 이 들자 미리 준비하였던 비축미(備蓄米)를 헐어 구휼하니
조정에서는 새서(璽書)를 내려 표 창하였고 마필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임기가 끝나게 되자 안집사가 민원을 받아들여 일년
의 유임을 청하였고, 일년이 지나 떠나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기도 하였다. 또 춘천 에 있을 때는 보삼고(補參庫)란
제도를 만들어서 해마다 나라에 조공하는 인삼으로 백성들 이 곤
란한 것을 면해주었다. 춘천은 관동의 요새라 연무청을 설립하
여 무사를 훈련하였 고, 좌수영에 있을 때에는 ‘해골선’이란
병선을 창안하여 건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좌병사로 있을 때는
당나라의 이위공 정과 명나라의 문장공구경의 말을 듣고 독륜병
거(獨輪兵車)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군사를 통솔함에 있어서
는 군율이 엄숙하였고, 부하를 대할 때는 사랑으로 대하였다.
왕이 능행(陵行) 할 때에 왕을 맞게 되었는데 기고(旗鼓)가 엄
숙하고 행오(行伍)가 정제한 것을 본 왕이 특별히 마필의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동성(東城)의 치첩(雉堞) 을
설치할 때는 그 공사의 감독을 하였고, 늙어서 다시 회녕부사
(會寧府使)의 임명을 받자 모든 사람들이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록지신으로 어찌 거역하고 한 몸의 안위만 생각 하랴”
하고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회녕 임지(任地)에 도착하여 기묘
년에 생애를 이곳에서 마쳤다. 덕산면 덕숭산에 반장(返葬)하였
고 그곳에 분묘가 있다. 슬하에 삼형제가 있었는데 큰 아 들 광
집은 내금강으로 둘째 아들인 광국은 수사로, 셋째 아들 광훈
은 북병사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