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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서(李舒)
작성자 홍성문화원 등록일 2004-07-09 조회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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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자는 맹양(孟陽)이고, 호는 당옹(戇翁)이다. 고려조 제
주였던 오경사 이성의 아우이 다. 그의 아버지가 큰아들을 낳
을 때에는 고죽 한 그루를 꿈꾸고 성을 낳았고, 작은 아들을
낳 을 때에는 한 노인 이 옥(玉) 한 개를 주면서 “이것을 강태
공이 위수에서 낚시질하던 낚시이다” 라고 주어 그것 을 받고
서(舒)를 낳았다고 한다. 그는 재주가 있어서 여덟살 때에 『효
경(孝經)』을 읽었고 용봉사에서 글 읽 을 때에 뜰 앞의 죽순
(竹筍) 한 그루가 비바람에 쓰러진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小叢低地 纖筍弱搖風 他日千竽玉 那知倚半官
그는 사마(司馬), 즉 진사에 뽑히고 5년 후에는 대과에 당선되
었는데 그 해 4월에 중국에 들 어가 문영전(文英殿) 책문과 을
과에 당선되었다. 겨우 25세의 젊은 나이로 두 나라의 과방에
합격한 것은 훌륭 한 일이다. 한림 (翰林), 정언(正言), 청주
사록(淸州司綠), 수찬(修撰)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당
시 신돈 이 조정을 탁란(濁亂)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홍주
에 돌아와 19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 때 부모상을 당하
여 시묘(旌墓)를 살아 유림들이 정려(旌閭)를 세우기도 하였
다. 요승 신돈이 처형되고 공민왕이 승하하여 우왕이 대위를 계
승하게 되자 일부에서는 우(禑) 가 신돈의 아들이 라 하면서,
중국의 진나라 원제가 본래 우금의 아들로 진나라 사마씨의 왕위
를 차지하여 그 후 우(牛)로써 마 (馬)를 대신하였다는 풍설처
럼, 우왕도 본래는 신돈의 아들로 왕씨의 왕위를 대신하였다는
풍설이 전해졌다. 그것은 이성계 일파에서 유포한 것인데 이
때 이서는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읊었다. 借在新亭諸客層 相看
何事淚成血 牛承馬業誠難欺 千載長存直土筆 고려가 망하고 이성
계가 왕위에 오른 후 국호를 결정하기 위하여 이서는 밀직부사
한상질 (密直副使 韓尙質), 조반(趙伴) 등과 더불어 명나라에
들어가 국호를 조선, 화령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해야 할 것인지
명제의 결정을 의뢰하였다. 이에 조선이란 국호를 제정토록 하
여 국호를 조선이라 하게 되었다. 그 해 9월 이서는 익대개국공
신 가선대부 경연강독관(翊戴開國功臣 嘉善大夫 經筵講讀官)
이 되고 계유년 10 월에는 추충익대개국공신 대사헌 도평의사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무인년 팔월에는 안평군 에 봉해졌고 신
사 년 윤 삼월에는 보국숭록대부 우정승 판의정부병조사가 되었
으며, 동년 유월에 우승상에서 좌승상이 되었다. 이 때 왕실에
서는 세자(世子) 책봉(冊封) 문제로 왕자 사이에 다툼이 계속
일어났다. 결국 태조의 둘째 아들 인 정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결국 일년 후에 다섯째 아들인 태종에게 선위되자, 태조는 크
게 노하여 함흥행궁 (咸興行宮)으로 옮겼다. 태종이 문안사신
을 보냈으나 태조는 문안사신(問安使臣)만 오면 죽 여, 온 조정
이 송 구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때 태조가 이서를 보
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고 태종은 즉시 이서에게 글을 보 내 함흥
으로 갈 것을 재촉하였다. 이서는 태종의 명을 받고 함흥으로
떠나 강변에 말을 매어 놓은 다음 단소를 불어 태조가 듣도록 하
였다. 태 조가 단소 소리가 귀에 익어 근시에게 물으니 근시가
고하되 이서가 왔으니 감히 물어와 뵙 지 못하고 그곳에 서 머물
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태조는 곧 내시를 보내 서를 불러 손
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하였다. 서 는 배알을 마치고 시
한 수를 올렸다. 태조가 그 시를 보고 지난날에 군신간에 있던
일을 회상하는 동안 강변에 매어 놓은 말이 계속 울어댔다. 그
러자 태조는 “말이 왜 저렇게 우느냐”고 물었다. 서는 “그
말이 얼마 전에 새끼를 낳았는데, 새끼를 떼어놓고 와 그것을
생각해서 슬피 우는 것 같습니다”하고 아뢰었다. 태조는 그 말
을 듣고 마음을 돌 려 즉시 서울로 환 궁하였다고 한다. 이것
을 자마풍간(子馬諷諫)이라고 하였다. 이서는 경인년 9월 9일
에 세상을 떠났는데 시호는 문간이라고 하였고 묘는 장곡면 지정
리 지명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