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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辛旽)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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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돈(辛旽)
작성자 홍성문화원 등록일 2004-07-09 조회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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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구지(結城舊誌)』 사찰편에 보면 성기암은 벽지산 서쪽
에 있었는데 요승 신돈(辛旽) 이 처음으로 불문에 입적하였다
한다. 본조에 군수 남응민은 이것으로 이 암자를 환속시켜 철폐
된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다시 초암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기에
신돈에 대한 기록을 수 록한다. 結城舊誌原文 : 聖起庵在碧池山
西 高麗恭愍王時妖僧辛旽起此佛門 本朝郡守南應敏 以此還 俗此
庵 舊廢今復有草庵云云 고려 공민왕조의 신돈은 그의 출생지와
누구의 후예란 것이 밝혀지지 않았고 어떻게 공민 왕조에 깊숙
이 발길을 디디게 되었는지 그 사실마저도 알 길이 없다. 공민
왕조의 삼중대광 도첨의 취성군이란 권좌(權坐)에 앉아 법명을
편조(遍照)라 하고 정권을 농락하며 수많은 축 첩(蓄妾)을 하였
을 뿐 아니라, 경재상의 부녀자를 비롯하여 개경안에 있는 모
든 여자들을 함 부로 농락하였다. 그러나 감히 어느 누구도 막
지 못하고 도리어 그 권력이 두려워 보화(寶貨)를 헌정(獻呈)하
였다. 왕이 내리는 녹(祿)은 받지 아니하고 여색을 멀리 하는
체하여 전원(田園)을 취하지 아니하는 듯 청백한 것을 과시(誇
示)하여 기군(欺君)을 감행하니, 공민 왕의 총애와 신임이 날
로 높아갔다. 이와 같이 되자 그는 다시 세가대족들을 닥치는
대로 주살(誅殺)하니 모든 사람들이 전전 긍긍(戰戰兢兢)하여
범보다 무서워하였다. 그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심하였다. 밤
이 되면 고 관들을 불러다가 자기의 제택을 수직하게 하고, 출
입할 때는 시중이하의 관료들로 전차후옹 (前差後擁)하여 위세
를 자랑하니 교통이 전색(塡塞)되어 점포의 문을 닫아야 하는
실정이었 다. 그의 심복중에 기현, 최사원, 이춘배, 김난 등
의 일파가 조정을 탁란하더니 공민왕이 헌종 과 경종의 능(陵)
에 행행(行幸)한다는 소식을 알고 신돈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심복들로 하 여금 왕을 시해토록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자 크게 노하여 일당들을 질 책하고, 그날부터 밤
마다 심복들을 모아놓고 흉모(凶謀)를 하였다. 문객 중에 이인
이란자가 있었는데, 역모(逆謀)하는 사실을 기록하여 한림거사
(寒林居士)란 익명으로 재상(宰相) 김 속명의 저택에 밤에 투서
(投書)하고 변장한 채로 행적을 감추었다. 김속명이 즉시 이 사
실 을 왕에게 주달하고 순위부로 하여금 기현, 최사원, 정구
한, 진윤덕, 기중수, 한을송, 고인기 등을 체포하여 국문하였
다. 그들의 죄상이 드러나자 왕은 “ 전일에 익제가 항상 신돈
을 앞으 로 나라를 어지럽힐 것이라고 하더니 과연 선견지명이
있다” 고 탄식하였다. 신돈은 수원으 로 유배하고 일당을 처형
하니 서부대간이부(西府臺諫理部)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대역은 천하만세에 용납할 수 없는 죄인이라 신돈은 본래 미천
한 승려로 과분한 천총(天寵)을 입고 위가 극에 달하여 백관의
진퇴를 임의로 자행하고 널리 흉도들을 모아 조정을 탁 란하더
니 조종의 도우심과 전하의 밝으심으로 흉모가 드러났으나 관용
하시와 유배에 그치 시니 이는 삼한의 바라는 바가 아니요, 또
돈의 여당이 기현 등 7명에 그치리잇까? 바라옵건 대 전하께서
는 대의를 위하여 돈을 극형에 처하시고 가산은 적몰하시는 동시
에 남은 무리들 을 숙청하사 중망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소서.
공민왕은 상소를 보시는 즉시 대사성 임박과 판사 김두를 보내
어 처형하고 사지를 베고 목 을 끊어 도성에 효수(梟首)하였
다. 원래 신돈은 개를 싫어하며 음란하여 항상 새와 닭을 즐
겨 먹고 백마를 잡아 조양(助陽)하니 당시 사람들이 신돈을 노
호정(老弧精)이라 하였다 한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