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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득의(林得義)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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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임득의(林得義)
작성자 홍성문화원 등록일 2004-07-09 조회 633
첨부 gif 홍성문화원.gif
임득의의 자는 자방(子方)으로 평택인 교리 임식의 차자요, 임
득인의 아우이다. 선조 29년 병신 7월 6일 종실 이몽학이 홍산
에서 반란을 일으켜 인접한 임천, 정산, 청양, 대흥 등을 함 락
하고 홍주성을 침범하자 홍주목 홍가신을 도와 반군을 소탕한 공
으로 청난공신삼등(淸難功臣三等)에 기록되었다. 벼슬은 충청수
우후(忠淸水虞侯)에서 경상우도병사에 이르렀는데 만력 임자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서부면 판교리 청룡산에 있고 묘
소 앞에는 그가 세 상을 떠난 304년 후인 정사년에 지산 김복한
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碑文> 奮忠出氣淸難功臣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兼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知諫院
事 平城 君行 折衝將軍 慶尙右道兵馬節度使 팽성임공(彭城林公)
의 옷과 신발을 감춘 곳이다. 공이 돌아가신 후 비를 세우기를
의논하 러 와서 비명(碑銘)을 부탁하니 글이 짧고 병든 몸이나
마 세의가 있는터에 감히 끝끝내 사양 치 못하고 이에 기록하는
바이다. 공의 이름은 득의나, 자는 자방(子方)이니 당나라 한림
학 사 팔급으로 시조(始祖)를 삼아 고려말기에 태사 충간공 성
미(成味)가 나라가 망한 후 벼슬 을 버리고 세상을 피하였다.
증조 준(畯)은 비병사를 지냈고 할아버지 이름은 정수(貞秀)로
좌랑(佐郞) 벼슬을 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식(植)이니 문과교
리로 별호는 송파(松坡)니 금호형수의 종자이었으며, 공의 공훈
으로 보조공신(補祚功臣) 증 영의정 평릉부원군의 증직 (贈職)
이 있었다. 송파공은 재취하였는데, 정경부인 해주 최씨는 군
수 제운의 딸이요, 창원 씨는 참판 필의 딸 이었다. 공은 최부
인의 소생으로 가정 무오년에 태어나서 만력 임자년에 돌아가셨
다. 선조 병신년 홍산의 토적 이몽학이 왜란으로 피폐한 틈을
타서 감히 하늘을 쏘아보는 마음으로 무리를 모아 별안간에 일어
나니 형세가 대단히 거칠어 여러 고을이 바람에 쏠리듯 하였
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이 대항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홍주목
사 홍가신이 성을 굳게 지켰으나 역시 심히 위험하고 급하였
다. 공은 원래 지모(智謀)가 있고 힘이 뛰어나고 마침 고을 안
에 살던바 충성된 마음으로 여러 사람들을 격동하고 권유하여 의
병 팔백명을 거느리로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며 적병의 포 의
방을 뚫고 성내에 들어가 전략(戰略)을 세우고, 비가 올 것을
살펴 성 밖 가옥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비오기를 기다렸다. 며
칠 후 비가 계속 내리니 적들은 웅거할 곳이 없어 밤에 도망 하
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문을 열고 추격하니 적의 시체가 들에
가득하였다. 괴수의 머리를 베고 난리는 평정한 다음 첩보를 조
정에 보하였다. 이로 인하여 충청수우후가 되었다가 경 상우도
병사가 되었다. 갑진년에 청난공신 삼등을 책봉하고 또 호성원
종훈(毫聖原從勳)에 기록하였다. 교서에 선입낭서(選入郎署) 역
시군현(歷試郡縣) 낭서(郎署)에 뽑혀 군현에 두 루 시험하였다
는 일로 보아 공을 세우기 이전에도 치적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
이 되나 상고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병신년에 세운 공은 임금
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지성에서 한 일 이요, 벼슬이나
책임이 있어 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 성을 버리고 피한 자에게
비하면 어떠한 가. 나라를 위태로움에서 구하고 한 지방의 주민
들을 난세(亂世)에서 구하였으니 공은 사직 을 붙들고 생민들
을 편하게 하였는데 평일에 행적을 전하지 못하는 것을 한할 것
인가. 증 정 경부인(貞敬夫人) 여흥 민씨(驪興 閔氏)는 찰방
(察訪) 노남(怒男)의 딸이요, 부원군(府院君) 효(孝)의 증손
(曾孫)이다. 4남 2녀를 두었는데 찬의 목사요, 집은 현감이
요, 전은 문과로 부 제학(副提學)이다. 우(&#23886;)는 참봉(參奉)이
었고, 딸은 이상필 윤수(尹需)에게 시집갔다. 목사 의 계자(繼
子) 진교(震喬)는 출후(出后)하였고, 유교(有喬)는 진사(進士)
이요, 지교(之喬)는 부학사(副學士)요, 세교(世喬)는 현감이
요, 참봉의 아들은 참판(參判)이었다. <비명(碑銘)> 옛날 임진
년에 난리가 지리하여 근심과 걱정이 백가지였다. 미친 도적이
그때를 타서 여섯 고을을 함락시켰다. 도성이 놀라 동요하였으
나 조정에서는 좋은 계책이 없었으니 누가 능 히 평정하였을 것
인가, 제 마음대로 날뛰게 되었으니 달은 이지러지고 홍양의 운
명이 조석 에 있었다. 장하다 임고이여! 팔백명의 의병이 눈물
을 뿌리며 갑옷을 입고 말을 성 안으로 몰 고 들어가니 군사들
의 얼굴이 밝았다. 아는 것이 귀신같고 힘은 호랑이 같아 먼저
앞장서서 나아가 치니, 사나웠던 도적의 무리가 평정되고 며칠
안 되어 첩서를 올리니 호해(湖海) 가 맑게 되었다. 임금님이
그 공을 칭찬하고 봉작을 더하였다. 교서는 산하를 맹서하고 외
임 을 제수하여 크게 쓰려 하였더니 포부를 다하지 못했다. 네
아이들이 나라에 출세하였다. 지 난날에 그의 행적이 밝혀지지
는 않았으니 그가 세운 공이 소소하게 드러났다. 용의 머리에
거북의 발 네 돌을 갈아 세워 그의 사적을 자손들이 정성을 다하
여 그 실적을 새 겨 길이 천추에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