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광윤(李光輪)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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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홍성문화원 | 등록일 | 2004-07-09 | 조회 | 6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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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 이광윤의 자는 중임(仲任)이요, 고려조의 문절공 이행 의 6대손으로 청양군 비봉면 방 한리 신기동에서 명종 2년 을 사 12월7일에 출생하였다. 천성이 인자하고 의를 존중하며 효로 서 부모를 봉양하더니 33세가 되던 해에 효행으로 추 천을 받 아 생원시 에 응시하여 문소전 참봉이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선 조 26년 4월에 왜적이 돌연 남해를 건너 우리나라 남단인 부산 과 봉래를 함락하고 북으 로 진군하였다. 이 로 인하여 선조는 비빈(妃嬪)과 백관(百官)을 이끌고 서경을 거쳐 의주를 항하여 몽진을 하 는 공전(空前)에 없 는 국난에 봉착하였다. 우리 관 군은 도처에서 패주하고 백성은 유리하였으며, 국토는 초토 가 되고 설상가상으 로 기근(饑饉)마저 겹치는 등 실로 아비규환 (阿鼻叫喚)의 처참한 장면이 도처에서 되풀이 되 었다. 이광윤 은 좌시할 수가 없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창의하기를 간청 하였다. 부모의 승낙을 받고 뜻 을 같이 할 수 있 는 친우와 친 척, 그리고 향리의 장정들을 모으는 한편, 가산을 털어 출전을 서둘렀다. 삼백명 의 창의군을 이끌 고 출발에 앞서 부모에게 하직을 고하였다. 다시 장자 대준을 불러 “내가 이번에 가면 전장 이 사지(死地)라 살 아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아 의복에 네가 보는 것과 같이 이렇게 표식을 하였으니 그리 알 라” 하였 다. 대준도 배종하기를 원하니 “너는 아버지 대신하여 조부모 를 지성껏 받들도록 하라” 하고 청주를 향 하여 발길을 재촉 하 였다. 원래 이광윤은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추탄(楸灘) 오 윤겸과는 각별한 교분이 있었다. 조 중봉이 창의군을 이끌고 청 주 작전에 참가한다는 연락이 오자 이광윤은 조치원 부근에서 그 들과 합세하여 청 주를 향해 진군을 재촉하였다. 청주에는 방어 사(防禦使) 이옥(李沃)과 윤공(尹栱)이 청주 작전에 패하고 성 은 왜병의 손 에 들어갔다. 승장 (僧將) 영규대사(靈圭大師)가 승병을 이끌고 청주성 탈환작전을 위하여 고군분투(孤軍奮鬪) 를 할 때 이광윤 의 창의군과 조중봉의 창의군이 삼면으로 청주 성을 포위하고 격전을 벌여 마침내 청주성을 탈환하고 적병에 게 치명상을 주는 전과를 거두었다. 때마침 고경명이 금산작전 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이 전 해졌다. 청주전에 서 승리한 삼노 군은 배도(倍道)하여 금산을 향해 달려갔다. 금산에는 적의 정 예부대인 선발 대가 적정(敵情) 을 탐지하기 위하여 만명이 집 결되어 있으니 잠시 행군을 멈추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 자 나라를 위하 여 죽을 땅이 이곳이라 하면서 적과 마주쳐 격전 하던중 수일 후 삼노군은 야습을 당하여 전 원이 옥쇄하였다. 이 중에는 이광윤이 인솔한 삼백명도 다같이 전사하였다. 이 소 식을 들은 장자 대준은 즉일 로 금산 전지로 달 려가 아버지의 시체를 거두었는데 이광윤이 적의 창검에 오른쪽 팔이 절단되었 음을 알게 되 었다. 이로 인하 여 금산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 는가를 짐작 할 수 있다. 현재 그의 분묘는 장곡면 옥계리 산 77번지에 안장되어 있다. 그 후 조정에서는 사헌부집 의 라는 증직과 정 려를 세우라는 명을 내리고 종용당에 중봉과 같이 배 형토록 하였다. 헌종 6년 유림들이 조정에 진언하여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吏曹判書兼知議禁府事) 오위도총부 도 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의 추증이 있었고, 옥계리에 정려가 세 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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