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웅 천 읍(熊川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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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보령문화원 | 등록일 | 2002-05-27 | 조회 | 12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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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마한)때부터 서서히 部落形成(부락형성)이 있었던 내포 (內 浦)의 들이다.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해서 農耕地(농경지)에 定着(정착)하는 百濟流民(백제유민)들로 크게 마을 이 이룩되어 갔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縣(소포 현)에 속해서 西林郡(서림군)의 領 縣(영현)에 속했으며 漁民 (어민)들의 마을形成(형성)이 두드러 지게 나타났었다. 高麗 (고려)때는 顯宗(현종) 9年(1018)에 架林 縣(가림현)에 속했다 가 한때 왜구의 侵入(침입)으로 차츰 황폐 화되어 갔었다. 잦 은 왜구의 侵入(침입)에 焦土化(초토화)되었 던 마을이 34代 (대) 恭讓王(공양왕)때부터 藍浦(남포)에 鎭 (진) 縣(현)이 생 기면서부터 군사를 주둔시켜 왜구를 철저하게 몰아내고, 흩 어졌던 流亡人(류망인)들을 소집(召集)함으로 다 시 재건을 보게된 地域(지역)이였었다. 朝鮮(조선) 太祖(태조) 6 年 (1397)에 兵馬使(병마사)를 두어 縣事(현사)를 겸하게 하였 으며, 世祖(세조) 12年(1446)에 藍浦縣(남포현)에 속하여 이 때 부터 安心(안심)하고 生業(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地域 (지 역)이었다. 道琛禪師(도침선사)의 말에 따르면 풀이해서 憂國(우국)의 人物 (인물)이 많이 배출되며 또한 道學(도학)이 묻힐 곳이라 하는 데, 熊川(곰내)의 周圍(주위)에 번지는 山과 들이 선비의 내음 을 훈훈하게 하는 內浦(내포)의 외곽인 것이다. 世祖(세조)후에 충청수사영(忠淸水使營)의 儉使營(검사영)이 篁橋里(황교리)「구 진」에 있어서 水軍(수군)의 軍船(군선)이 드나들었던 곳이기도 하고, 高宗(고종) 32年(1895)에 藍浦郡(남포군)에 속해서 熊川 (웅천)의 이름을 따서 熊川面(웅천면)이라 하여 冠洞(관동)외에 18個里를 관할하다가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古邑面(고읍면)의 外城(외성) 외 8個 洞里(동리)와, 新安面(신안 면)의 杜鳴里(두명리), 습의면(習衣面)의 碧洞(벽동)과 深田面 (심전면)의 東幕里(동막리)를 병합하여 熊川面(웅천면)이라하고 冠堂(관당), 獨山(독산), 小篁(소황), 篁橋(황교), 竹淸(죽청), 九龍(구룡), 盧川(노천), 杜龍(두룡), 大川(대천), 大昌(대창), 城洞(성동), 水芙(수부), 坪里(평리)의 13個里로 개편하여 관할 하여 保寧郡(보령군)에 속하게 되었다.`95년1월 1일 법률 제4774 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95년3월 2일 보령 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