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웅천읍 대창리(大昌里) | ||||
---|---|---|---|---|---|
작성자 | 보령문화원 | 등록일 | 2002-05-27 | 조회 | 1188 |
첨부 | |||||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 浦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 때에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으며 朝鮮末葉 (조선말엽)엔 藍浦郡(남포군) 古邑面(고읍면)의 地域(지역)인 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大川里(대천리), 防築里(방축리)와 習衣面(습의면)의 碧洞(벽동)을 병합하여 크 게 창성하라는 뜻으로 대창리(大昌里)라 하여, 保寧郡(보령군) 熊川面(웅천면)에 編入(편입)되었으며 `95년1월 1일 법률 제4774 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95년3월 2일 보령 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金用濟(김 용제), 崔熙準(최희준) 先生(선생)의 出生地(출생지)이다. 한 내 聖住山(성주산)에서 발원하여 扶餘郡(부여군) 外山面(외산면)의 중심을 흐르다가 嵋山面(미산면) 桃花潭里(도화담리)에 이르러, 北西(북서)쪽에서 오는 聖住川(성주천)을 합하여 珠山(주산)을 거쳐 大昌里(대창리)앞을 스치는「한내」옆에 자리한 마을이다. 「대천」이라고도 부르는데 「한내」냇물옆에 자리한 마을이라 「한천」,「대천」이라고도 부른다. 每園(매원) 黃羲敦先生(황희 돈선생)의 出身地(출신지)이며 韓國(한국) 最初女判事(최초여판 사) 黃允石先生(황윤석선생)의 出生地(출생지)임 접 동 곡(接 洞 谷) 市場(시장) 南東(남동)쪽에 자리한 마을을 接洞谷(접동곡)이라 고 부른다. 「접동골」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과 접해있다해서 接洞谷(접동곡), 「접동골」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옛날엔 한 때 큰 마을이었다. (접동은 蝶洞으로도 쓰여졌다.) 寺 洞 碧南(벽남) 南(남)쪽에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寺洞(사동)이 라고 부른다. 또한 「절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절이 있었 던 마을이라 寺洞(사동), 「절골」이라고 부른다. 양 지 뜸 碧洞(벽동) 북쪽에 자리한 마을을 「양지뜸」,「양지」라고 부른 다. 양지 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해서「양지뜸」,「양지」라고 부 르고 碧洞(벽동) 응달쪽에 자리한 마을은「음지뜸」「음지」라 고 부른다. 웅 천 장(熊 川 場) 市場(시장)에서는 熊川面(웅천면)의 장이 서는 자리다. 大川里 (대천리)구장터에서 장이 섰었는데 1929年에 이곳에 옮겨왔다. 웅 천 역(熊 川 驛) 市場(시장) 東北(동북)쪽에 長項線(장항선) 列車(열차)의 정류장 을 熊川驛(웅천역)이라고 부른다. 1928年 8月1日에 이곳에 자리 하기 시작했다. 완 정 포(浣 汀 浦) 南塘(남당)과 碧洞(벽동)사이에 浦口(포구)가 있는데 이 浦口(포 구)가 浣汀浦(완정포)라고 부르는 浦口(포구)다. 배가 드나드는 浦口(포구)다. 朝鮮中葉(조선중엽)까지는 靑淵浦(청연포)라고 불 렀다. 시 장(市 場) 碧南(벽남) 東北(동북)쪽으로 자리한 마을이 市場(시장)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熊川場(웅천장)이 5日에 한번씩 선다. 삼 바 위 샘 碧南(벽남) 東(동)쪽으로 「운봉」산 기슭에 샘이 있는데 이 샘 을 「삼바위샘」이라고 부른다. 샘물이 매우 차서 약수로 통하 는 샘물로 옛날에는 여기 약수를 마시러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 다. 碧 洞(벽남) 碧南(벽남) 중심에 자리한 마을을 碧東(벽동)이라고 부른다. 마 을을 「양지뜸」, 「음지뜸」으로 나눈다. 防 築(방축) 碧南(벽남) 北東(북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防築(방 축)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방축이 있다해서 「방축」「방축리」 라 부른다. 남 당(南 塘) 碧南(벽남) 서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南塘(남당), 南 塘里(남당리)라고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