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홍주성(洪州城)(조양문,아문,산성)

홍주성(洪州城)(조양문,아문,산성)

소개

【구 분】 사적 제 231 호(1972.10.14 지정)
【소재지】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00-2
【시 대】 삼국시대
【면 적】 46,961m²
【수 량】 1기

내용

홍주읍성은 일월산(일명 월산)이 동쪽으로 이어지면서 홍성천과 월산천을 경계로 형성시킨 구릉의 둘레에 쌓은 성곽을 일컫는다.
[참고문헌] 이남석․조원찬, ≪홍성의 문화유적≫, 1997, 홍성문화원.
  이 성은 자연적으로 홍성천과 월산천을 해자(적의 침입을 막는 1차 방어선)로 이용하게 되며, 홍성으로부터 청양방면이나 예산방면을 방어할 수 있는 좋은 전략적 위치를 갖고 있다.
  홍주읍성의 처음 쌓은 연대는 물론 고려시대까지도 수․개축(修․改築)의 기록은 살필 수 없다. 다만 조선조의 여러 기록에서 확인이 가능할 뿐인데 내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세종실록지리지》 읍성조(邑城條)에 의하면,

 “邑石城(周回五百三十三步二尺內有泉一冬夏不竭)” <(  )는 原註>
 (읍석성(주회오백삼십삼보이척내유천일동하불갈))
이라고 하여 “읍성(邑城)은 석축(石築)으로서 둘레가 533보(步) 2척(尺)이며, 성안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여름이나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홍주읍성의 존재와 함께 대략적인 규모를 짐작케 한다.
  그후 홍주읍성은 조선 초기의 문물 제도의 정비와 더불어 중앙 집권 체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지방 행정 구획의 개편과 왕실의 대행자라는 명분에 힘입어 각 관읍(官邑)의 위엄도 동시에 갖추어지게 되었는데, 이 때 홍주읍성도 대대적으로 수축되었던 것 같다.
  예컨대 《문종실록》권9 원년 9월 경자조(庚子條)에 의하면,

 “洪州牧邑城 (周回四千八百五十六尺 高十一尺 女墻高三尺 敵臺二十四 內十八未築 門四 內一無擁 城女墻六百八 城內井二 小川一 海子未鑿)” <(  )은 原註>
(홍주목읍성 (주회사천팔백오십육척 고십일척 여장고삼척 적대이십사 내십팔미축 문사 내일무옹 성여장육백팔 성내정이 소천일 해자미착))

이라고 적고 있어, 새롭게 신축한 홍주 읍성의 규모는 성의 둘레가 4,856척이고, 높이는 11척이며, 여장의 높이가 3척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적대(敵臺)는 24개중 6개소만 쌓았고, 문은 4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옹성이 없으며, 여장이 608이라고 기록하였다. 아울러 성내에는 우물이 2개소가 있으며, 또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음도 기록하면서 해자는 시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후 홍주 읍성의 개축(改築)은 현종대에 이르러 한계수(韓桂洙)에 의하여 중수되고, 순조 24년(1824)에 진장(鎭將) 김계묵(金啓黙)과 목사(牧使) 이헌규(李憲圭)에 의하여 수리되었는데, 이러한 내용은 현재 홍주읍성 안의 홍성 문화원 남쪽 옆에 남아 있는 수성기적비(修城紀績碑)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종 7년(1890)에 목사 한응필(韓應弼)이 조양문(朝陽門)을 짓고 경의문(景義門)․망화문(望華門)과 관영(官營)을 설치하였음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홍주읍성은 전체 성벽 둘레가 약 1,460m 중에서 700여m 정도만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동쪽의 성벽은 북쪽 부분을 제외한 남쪽에서 약 250m 가량의 성벽이 잔존하지만 성벽 밖의 높이는 4~5m 정도이고 부분적으로 보수된 상태로 남아 있다. 성돌을 쌓은 구조를 살펴보면, 먼저 밑 부분의 제1단 기단석을 바깥쪽으로 10㎝~20㎝ 정도 내밀어 깔고, 그 위에 나머지 성벽을 쌓았다. 그 중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부분에서는 15단~20단까지 확인할 수 있으며, 내탁(內托)에 의한 축조 방법을 알 수 있다.
  동벽과 남벽이 교차하는 곳에는 길이 6m, 폭 6m의 치성(雉城)을 설치한 것이 남아 있는데, 남벽은 직사각형의 큰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는데, 현재 150m 가량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성벽의 중간 부분으로 3~4단만 본래의 성벽에 사용된 성돌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대부분 최근에 복원된 상태이다. 이곳의 축성 방법에서는 성벽의 바깥면에 요철(凹凸)을 두면서 군데군데 쐐기돌을 박은 구조로 쌓았는데, 이러한 방법은 조선시대 전기의 전형적인 축성법으로 이해되고 있다.
  서쪽벽은 현재 300m 가량이 남아 있는데, 25~30단까지 일차 가공된 자연 할석으로 바깥면을 고르게 맞추면서 거의 수직으로 축조하였다. 그러나 읍성의 서벽 북쪽 부분과 북벽, 그리고 동벽의 일부는 도로와 건물 등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한편 성문은 문종대에는 4개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조영(造營)한 것은 3개뿐이었는지 남문이 없다. 또한 동문과 서문의 경우에는 문루가 있었지만 북문에는 문루가 없다. 읍성의 동문인 조양문(朝陽門)은 팔작지붕에 다포계 건물로 정면 3칸의 문루(門樓)로서 고종 7년(1870)에 한응필(韓應弼)의 개수(改修)로부터 비롯되며, 조양문 현판은 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하였다. 그후 조양문은 1975년에 완전 해체․복원되었다.
  이 성은 1905년의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이세영․채광묵․안병찬 등이 이듬해 5월 19일 1,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시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6문의 화포로 공격하여 덕산으로 퇴각시키고 점령한 전투로도 유명하다.
[참고문헌] 이남석․조원찬, ≪홍성의 문화유적≫, 1997, 홍성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