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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사적 116호)

해미읍성 (사적 116호)

내용

조선 고종 9년(1872)에 저술한 해미 군지와 고종 36년(1899) 

에 발간된 해미읍지의 문헌기록에 의하면 조선 태종 7년(1407)
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병합하여 해미현을 설치
하였으며 태종 14년(1414)에 덕산(德山)에 두었던 충청 병마절도
사영을 해미로 옮겨 온 후 효종 3년(1652) 병사영을 다시 청주
로 옮겨 갈 때 까지 238년간 해미는 호서지방의 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는 호서좌영으로 삼고 전영(前營)을 홍주(현 홍성) 우영에 공
주, 중영을 청주, 후영을 충주에 두고 호서지방을 방어케 하였는
데 해미호서좌영에는 병영장이 현감을 겸임하는 겸영장을 두고
병무와 행정을 담당케 하였다. 숙종 19년 (1693)에 해미의 호서
좌영이 온양으로 옮겨 가면서 해미에는 현감을 두고 다스려 오다
가 다시 숙종 38년(1712)에 겸영장을 해미로 환원시키고 해미,
대흥, 온양, 면천, 태안, 결성, 예선, 평택, 아산, 신창, 덕산,
당진 등을 조선말까지 관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원군 천주교
박해사건 당시 체포된 천주교 신도들을 이 곳 해미읍성에 압송하
여 처형한 순교지 이다.
해미읍성 성곽을 쌓기 시작한 연대는 전해지는 기록 문헌이 없
어 알 수 없지만 병마절도사영이 주둔한 이후부터 축성하기 시작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곽의 성 돌에 공주, 청주 등의 지
명을 공사 구간별로 음각으로 표시된 것을 볼 때 관할지역의 장
정들을 동원해서 성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 축성이 완공
된 것은 진남문의 안쪽 상단의 장대석에 '황명홍치사년신해건(皇
明弘治四年辛亥建)' 이라고 음각된 명문으로 볼 때 조선 성종 22
년(1491)에 축성이 완공된 것으로 본다.
1926년 발간된 서산군지에는 성곽둘레 6,630척, 높이 13척, 치
성 380첩, 옹성 2개소, 문은 동서남문이 있고 분문과 초루와 포
루는 없으며 성내에 우물이 6개소, 탱자나무가 성곽을 둘러싸고
있으며, 관아건물로 동헌, 객사, 아관청, 착창, 장군창, 현사
청, 내아, 옥사, 책실, 사령청, 교련창, 관노방, 고자실, 외삼
문, 내삼문, 동서남문루가 있으며 그 규모와 면적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진남문 우측에 현존한 '해미 좌영루첩중수비'의 기록 문에 헌
종 14년(1849)박민환이 해미 겸영장으로 부임하여 헌종 17년
(1850)까지 폐허된 읍성을 크게 중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조
선말엽에 크게 수축했음을 알 수 있다. 읍성내의 관아 건물들
은 대체로 일제 초기까지 존재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
서 정내에 학교, 면사무소, 우체국등 현대 건물을 건축하면서 관
아건물 대부분 매각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축되어 훼손이 극심하
였다.
현재 읍성내 복원된 건물은 동헌, 관아문, 책실, 동헌부속사,
망루(청허정), 동문,서문,남문, 포루 2동 등 10동의 관아 건물

이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