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태안 교육문화유공송덕비 제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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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태안문화원 | 등록일 | 2005-12-08 | 조회 | 2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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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군 교육문화 송덕비 제막
태안지역사회에서 교육에 대한 유공자에 대한 송덕비가 문화예술회관에 건립이 되었습니다.
12월 7일 태안문화원(원장정우영)에서는 지역교육문화 유공자 송덕비를 문화예술회관 앞에 건립하고 제막식을 실시하였다. 화강암과 애석으로 된 높이 4m의 송덕비는 태안 교육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5인의 선각자들에 대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는데, 비석에 새겨진 인물은 후학들을 교육시켜 우리지역의 유풍을 크게 진작시킨 전우 선생과 조희천선생 그리고 신학문을 도입하여 인재를 길러주신 이희열선생 과 김병년선생, 여성교육을 육성시켜주신 박채근선생 등 다섯 분에 대한 공적을 기록하고 있어 태안의 교육문화의 상징으로 보전 될 것이다.
건립취지(建立趣旨)
여기에 기록된 다섯 분들은 태안교육에 크나큰 업적을 남기신 선생님들이시다 물론 이분들 이외로도 조선조 숙종 때 곽시징(郭始徵) 선생이 환동에서 5년 동안 훈학한 사실은 있으나 누구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없고 신학문이 들어오면서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화림농장강습소를 비롯한 강습소와 진흥회들이 있었고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들이 있었으며 중학교 과정으로 태안과 안면에 고등공민학교와 기독교 계통의 성중학교 또는 삼육중학교 등이 교육에 이바지한 공로는 대단하지만 학교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다만 원북의 ‘계도농축’은 학교로 승격되기 직전 실패하였고 고남의 ‘안남중학교’ 는 학교로 발전하여 2004년까지 이어졌으나 학생수의 감소로 폐교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교육에 대한 유공자들은 한없이 많지만 후학들을 교육시켜 우리지역의 유풍을 크게 진작시킨 간재(艮齋) 나 난사(蘭史) 또는 신학문을 도입하여 인재를 길러주신 원려당(遠慮堂) 이나 소정(紹庭) 그리고는 여성교육을 육성시켜주신 동호(東湖) 등 다섯 분에 대한 공로는 더욱 지대하여 태안을 빛낸 교육문화 분야의 유공자로 선정 이 자리에 송덕비를 세우노라.
2005년 12월 일
공적사항(功績事項)
전우(田愚)(1841~1922) 公의 字는 子明, 號는 艮齋, 本貫은 潭陽으로 憲宗 7년 전주시에서 아버지 在聖과 어머니 南原梁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21세에 충청도 아산에 머물던 全齋 任憲晦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하였으며, 평생 관직에는 진출하지 않고 향촌에 머물면서 후진의 양성에 힘썼다. 華西 李恒老, 蘆沙 奇正鎭과 더불어 조선 말을 대표하는 대학자로 제자가 무려 2,000여명이 되었다. 1896년 봄 근흥면 수룡리로 이사하였는데, 1900년까지 5년 동안 수많은 제자를 양성함으로써 태안의 선비정신을 振作시켰다. 私稿 67권 외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조희천(趙羲天)(1845~1924) 公의 字는 中五, 號는 蘭史, 本貫이 平壤이고, 憲宗 11년 원북면 대기리에서 아버지 存恒과 어머니 靈山辛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500명이 넘는 제자를 키워 태안에서는 艮齋 先生과 더불어 전통교육의 두 축을 이루었으며, 주도적으로 泰安鄕約을 시행하여 敎化에 힘썼다. 1902년 향교 중수에 참여하여 향교중수현판기를 썼고, 1911년 華陽義塾의 설립에 참여하고 移建 내력을 담은 思樂亭改作學校記를 지었다. 蘭史記와 詩集 여러 권을 남겼으며, 후손이 펴낸 蘭史遺稿가 전한다.
이희열(李希烈)(1831~1918) 公의 字는 壽卿, 號는 遠慮堂, 本貫은 固城이다. 순조 31년 태안읍 남문리에서 아버지 東稷과 어머니 文化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貧民을 賑恤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고, 나라로부터 嘉善大夫 兵曹參判 등의 벼슬을 제수 받은 바가 있다. 1905년 옥하리에 태안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華陽義塾을 설립하여 1909년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10년 학생이 80여 명으로 늘자 思樂亭으로 校舍를 넓혀 이전하였다. 화양의숙은 1911년 태안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는데, 이가 곧 현재의 태안초등학교이며, 2005년까지 19,73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김병년(金炳秊)(1855~1932) 公의 字는 聖淵, 호는 紹庭, 本貫은 安東이고, 哲宗 6년 홍성 갈뫼에서 아버지 鳳根과 어머니 晋州蘇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高宗 24년 별시 丙科에 급제하여 侍講院 輔德과 宮內府 承旨를 지냈다. 公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906년 안면도 승언리에 廣英新塾을 창설하고, 1909년 고등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20년 4년제의 안면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는데, 현재의 안면초등학교이며, 2005년까지 8,1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박채근(朴彩根)(1914~1974) 公의 號는 東湖, 本貫은 密陽으로, 1914년 원북면 방갈리에서 아버지 先敎와 瑞寧柳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公은 탁월한 사업가로서 인천에서 自手成家하였으며, 그 재산을 고향 후학들의 교육을 위하여 투자하였다. 1970년에 원이중학교의 학교 부지를 마련해 준 바 있고, 1973년에는 학교법인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이듬해 태안읍 남문리에 태안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1998년 태안여자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2005년까지 12,99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