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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계백 게시판 상세보기

[부여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장군 계백
작성자 부여문화원 등록일 2001-11-23 조회 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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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관등은 달솔이다. 660년에 김유신과 소정 

방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지금의 대전 동쪽 마도 
령)과 백강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 
(지금의 연산)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 · 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 
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 
을 버릴 각오를 하였다. 또한 병사들에게도 “옛날 월왕 구천은 
5천명으로 오왕 부차의 70만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격려하였 
다. 
그의 결사대는 험한 곳을 먼저 차지하여 세 진영으로 나위어 신 
라군에 대항하였다. 목숨을 버릴 것을 맹세한 5천 결사대의 용맹 
은 신라의 대군을 압도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신라군과의 
네 번에 걸친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반 
굴 · 관창 등 어린 화랑의 전사로 사기가 오른 신라의 대군과 
대적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었다.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 
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계백의 이러한 생애는 후대인들의 높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한 
편, 권근은 계백이 출전하기에 앞서 처자를 모두 죽인 것이 오히 
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결국 패하는 결과를 낳게 한 것이 
며, 계백의 그러한 행동은 난폭하고 잔인무도한 것이라고 평했 
다. 그러나 서거정 등은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백 
제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기에 자신의 처자가 욕을 당하 
지 않도록 몸소 죽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은 그 뜻과 절개를 
높이 사야 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백제가 망할 때에 홀로 절 
개를 지킨 계백이야말로 옛사람이 이른바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고 칭송하였다. 그 평가는 이후 조선시대 유학자들간에 그 
대로 계승되어 계백은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그 뒤 계백은 

부여의 의열사, 연산의 충곡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