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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매월당 김시습
작성자 부여문화원 등록일 2001-11-23 조회 1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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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 1435(세종17)-1493(성종24) 


▶ 본관: 강릉 
법호: 설잠(雪岑)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 췌세옹(贅世翁).... 

봄비가 주룩주룩 이삼월에 
모진 병 붙들고 선방에서 일어나 
중생에게 서쪽에서 온 뜻을 묻고자 했으나 
다른 중들이 기리고 높일까 두렵구나 
- 무량사와병 – 
김시습은 아버지 김일성과 어머니 선사장씨 사이에 서울의 성균 
관 부근 반궁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신라 알지왕의 후예 
인 원성왕의 아우 김주원의 후손으로 증조부 김윤주는 안주목 
사, 조부 김겸간은 오위부장을 지냈다. 아버지 김일성은 조부의 
덕분에 음직인 충순위의 벼슬을 받았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실제 
로 벼슬자리에는 나가지 못했다. 
그는 생후 8개월에 배우지도 않고 글을 알았으며 세 살 때는 시 
를 지었다 한다. 이때 이웃에 먼 친척뻘 되는 최치운이라는 학자 
가 그의 신기한 재주를 보고 그의 외할아버지에게 “시습”이라 
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시습”이라는 말은 논어의 첫머 
리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것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 김시습은 다섯 살 때 이계전이라는 스승에게서 <대학> 과 <중 
용>을 배워 통달하였다. 이때 그는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여 
임금의 귀에까지 들리니 당시의 임금인 세종은 승지 박이창을 보 
내 시험해 보도록 하였다. 불과 다섯 살의 나이에 천부적인 재주 
를 보이는 김시습에 놀란 박이창은 수차에 걸쳐 시험해 보았다. 
박이창은 전혀 막힘이 없는 시습의 문재에 감탄하여 세종께 아뢰 
니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아래와 같은 전지를 내렸다. 
“내가 불러 보고자 하나 남들의 이목이 있으니 두렵다. 집으로 
돌아가 드러내지 말고 학문에 힘쓰라. 자라서 학업이 성취되면 
내가 크게 쓰겠노라.” 
세종은 또한 비단 50필을 특별히 하사하며 혼자의 힘으로 가져가 
라 이르니, 다섯 살의 어린 김시습은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 
운데 전혀 당황치 않고 비단의 끝을 모두 묶어서 끌고 나갔다. 
이로 인해 김시습은 “신동 김오세”라 불리웠으며 “오세”라 
는 말은 김시습의 평생을 붙어 다녔다. “오세암”이란 말도 그 
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앞날이 기약되어 있던 그에 
게 불행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연이어 일어났으며 조선에서 
가장 불우한 천재가 되었다. 

▶ 김시습은 그 뒤 13세까지 성균관대사성인 김반에게서 『논 
어』. 『맹자』. 『춘추』등을 배웠고, 별동의 윤상에게서 『주 
역』. 『예기』등을 배우고 익혔다. 그가 15세 되던 해(13세 라 
는 설도 있음)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의 농장 옆에서 삼년상을 치 
르기도 전에 외조모까지도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병들어 집안 
의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그 무렵 김시습은 20세의 나이로 훈련 
원도정 남효례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그 후 삼각산 중흥사(북한 
산성 내에 소재하였으나 1909년 재난을 입어 없어짐)로 들어가 
글공부를 계속하였다 
역대 조선왕들 중에 가장 큰 업적을 이룩한 제4대 임금 세종이 
승하하고 세종의 장자 문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건강 악화 
로 재위 2년 3개월만에 3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문종의 
비 현덕왕후 권씨는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죽었 
다. 그리하여 왕세자인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 
게 되었는데 비극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세종이 승하하 
기 전 세종은 어린 단종이 세손으로 일을 때 성삼문, 박팽년, 이 
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을 불러 어린 세손 
의 앞날을 부탁했다. 
어린 단종이 즉위했지만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처리하게 되었고, 
문종의 고명(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일)을 
받은 황보 인, 김종서 등은 왕족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 
며 단종을 보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은 왕의 자리를 탐내고 정인지, 한명회 등과 모의하여 김종서, 
황보 인을 죽이고 아우인 안평대군을 역모의 누명을 씌워 강화도 
로 유배시켰다가 죽였다. 
모든 실권이 수양대군에게 넘어가고 완전 고립 상태에 빠진 단종 
은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말았 
다. 이에 반발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질, 
유응부 등이 단종의 복위운동을 꾀하다 김질의 배신으로 발각되 
어 여섯명이 모두 사형을 당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들을 일컬어 
사육신이라 하였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 
게 되자 조여, 원호, 이맹전, 성담수, 권절, 김시습 등은 세상 
을 개탄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후에 사람들은 이들을 생육 
신이라 부르게 되었다. 김시습이 삼각산의 중흥사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 수양대군에 의한 “왕위찬탈” 소식을 듣게 되었 
다. 이 소식에 비분강개한 그는 대성통곡을 하며 공부하던 책들 
을 모두 불사르고 그 길로 스스로 삭발하고 정처 없이 유랑의 길 
을 떠났다. 그가 맨 처음 발걸음을 옮긴 곳은 고려의 옛 서울 송 
도였으며 그곳의 자연과 유적을 두루 둘러보고 평양을 거쳐 묘향 
산으로, 다시 압록강으로 3년여를 유랑하며 지은 글을 모아 탕유 
관서록을 엮었다. 
1458년(세조4) 24세 때에는 관서 유람을 마치고 경기도를 거쳐 
관동지방으로 들어가 금강산, 오대산, 경포대 한송정까지 2년여 
를 두루 돌아보며 탕유관동록을 엮었다. 1460년(세조6) 그가 26 
세 되던 해 삼남 지방으로 내려가 각처의 명승과 백성들의 생활 
풍습을 돌아보며 남원을 거쳐 지리산을 돌아보고 경상도 해인사 
에 둘렀다가 경주의 금오산에서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그는 삼 
년여에 걸쳐 삼남 지방을 두루 유랑하여 1463년 탕유호남록을 엮 
었다. 
김시습은 9년여의 방랑 생활을 마치고 책을 사러 서울로 올라오 
게 되었다. 당시 세조는 효령대군의 도움을 받아 불사를 벌이고 
있었는데, 김시습은 효령의 권유로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내불당 
에서 교정일을 맡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이 평소 못마땅 
해하던 김수온은 공조판서의 자리에, 정창손은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공신들이 판을 치는 조정의 현실을 비관하여 경 
주 금오산으로 돌아와 금오산실을 짓고 칩거하게 되었다. 
1465년(세조11) 그가 31세 되던 해에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원각 
사 낙성식에 설법사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세 
조 앞에서 성덕을 칭송하고 원각사 찬시를 지어 바쳤다. 이에 세 
조는 원각사 주지를 맡아 이 절에 거처하도록 분부를 내렸으나 
병을 핑계되고 경주로 내려왔다. 그가 머물렀던 금오산실은 유명 
한 용장사터이며 “매월당”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이로 해서 그 
의 호가 매월당이 되었다. 그는 금오산에서 7년여를 고뇌와 병마 
에 시달리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등을 비롯하 
여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에 남겼다. 
그가 이렇게 금오산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 조정에서는 세 
조와 예종 두 임금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성종은 숭유문 
치를 내세워 널리 인재를 구하였다. 1471년(성종2)서울로 올라 
온 김시습은 성동의 폭천정사, 수락산 수락정사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으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때로는 욕설로 때로는 미 
친 사람 행세를 하며 울분을 삼켰다 

▶ 1481년(성종12) 그가 47세 되던 해 머리를 기르고 육식을 하 
였으며 조상에게 제문(祭文)을 지어 전죄를 사죄하고 안씨를 부 
인으로 맞아들여 환속하였다. 그가 20세에 혼인한 남씨 부인의 
기록은 전하지 않고, 47세에 다시 맞아들인 안씨 부인과도 혈육 
하나 없이 사별하고 말았다. 
부인과 사별한 얼마 후 1482년(성종13) 폐비윤씨사건이 일어나 
의견이 분분함을 보고 성종 14년에 관동지방으로 다시 방랑의 길 
을 떠났다. 그 당시 양양부사로 있던 유자한과 친교를 맺어 서신 
왕래를 하며 강릉, 양양, 설악, 춘천 등지를 여행하였다. 
학업에 모든 정열을 바치던 10대에서부터 천하를 유랑하며 현실 
을 냉철하게 부정 항거하던 김시습은 50대에 이르러 허울을 벗어 
버리고 초연자약하던 그는 마지막으로 찾아든 충청도 홍산 무량 
사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의하여 화장하지 않고 절 옆에 안치해 두었 
는데 3년이 지나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아 사람들이 성 
불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불교 의식에 따라 다비를 하였는데 유 
골을 모아 무량사에 부도를 만들어 안치하였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천재 시인이라 일컫는다. 

▶ 『매월당집』은 23권인데 약 15권 정도가 시로 이루어져 있 
을 만큼 방대하며 그 깊이와 폭이 만만치 않다. 그는 역사의 흥 
망성쇠를 시로 남겼으며, 전국토의 수려한 풍광을 아름다운 싯구 
로 표현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성, 현실성을 담은 시를 많이 지었는데 농민들의 
순수한 노동을 찬미하였다. 그는 백성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 
며 가진 자의 부정부패를 풍자, 고발하는 내용의 시들을 많이 남 
겼다. 또한 자신의 방황과 저항의 정신세계를 시를 통해 표현하 
고 있다. 
그는 금오신화를 지음으로써 우리 나라 소설의 세계를 한층 더 
발전시킨 출발점이 되었다. 중국의 소설 전등신화를 보고 착상 
을 하였지만 모방을 뛰어넘어 뛰어난 창의력을 보임으로써 일찍 
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금오신화는 일종의 단편소설집으 
로 원래 몇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간 
에 모두 없어지고 일부만이 일본에 전해져 두 차례 간행이 되었 
으며 지금은 겨우 5편만이 전해져 오고 있다. 5편의 작품들은 각 
각 개성적인 작품들로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남 
녀의 애정을 소재로 한 소설이며, 『남염부주지』는 작가의 뜻 
이 담겨진 소설로 세조의 왕위찬탈을 겨냥하여 쓰여진 소설이 
다. 또한 『취유부벽정기』』와 『용궁부연록』』은 용궁이라든 

지 가상의 세계을 펼쳐 상상의 날개를 펼친 점이 특기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