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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 윤증 게시판 상세보기

[논산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명재 윤증
작성자 논산문화원 등록일 2001-11-23 조회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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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714년 86세의 윤증이 사망했을 때 『숙종실록』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표현했다. 「윤증은 스승 송시열을 배신하여 사림
(士林)에 죄를 얻었다. 또 유계(兪棨)가 지은 『가례원류』(家禮
源流)를 몰래 그의 부친 윤선거(尹宣擧)와 함께 쓴 것으로 만들
려 했는데 수년 후 그 일이 탄로나 유계의 손자인 유상기는 화
가 나서 절교 편지를 보냈다.
윤증은 어렸을 때 유계에게 배웠는데 일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들
은 윤증이 앞뒤로 두 스승을 배신했으니 그 죄를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숙종실록』의 사관(史官)이 바라본 윤증은 두 스승을 배신한
배은망덕한 인물이다. 그것도 스승이 쓴 책을 자신의 부친이 쓴
책으로 만들려다 들통이 나 절교당하는 비양심적인 인물이다.
임금과 스승과 어버이(君師父)가 하나로 취급되던 유교사회 조선
에서 두 스승을 배신했다는 평가는 씻을 수 없는 오욕이었다. 하
지만 윤증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당시의 임금 숙종은 이런 시를
지었다.
「유림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하고 나 또한 그를 흠모했네 평생
에 얼굴 한번 못보았는데 죽었다는 소식 들으니 더욱 한스럽도
다」
또한 『윤증연보』(尹拯年譜)에 의하면 그의 장례 때 조문한 인
사가 무려 2천3백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그야말로 당대에 이름깨
나 있던 선비들은 대부분 조문한 것이다. 그중에는 서울에서 내
려온 수백명의 관학(館學) 유생들이 포함돼 있었다.
「앞뒤로 두 스승을 배신해 그 죄를 더욱 용서하기 어려운」 배
은망덕한 인물에 대한 숙종의 추모시와 밀물 같은 조문객은 어
떤 연유일까? 더구나 그의 집은 서울도 아니었다. 그의 집은 현
재의 행정구역으로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라는 한적한 농촌
이었다.
집 뒤로는 노성산이, 문 밖으로는 계룡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에 윤증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성(泥城)이라고 불렸던 이 한적한 농촌까지 2천
여명의 사람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조문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상반된 두 현상은 그만큼 그의 생애가 논란의 한가
운데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윤증의 생애에 관한 상반된
두 평가 중 진실은 무엇일까? 흔히 국가의 공적 기록인 「실록」
을 「정사」(正史)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공적 기록
이라고 해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하물며 조선 전 역사를 통틀
어 가장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의 기록은 비록 「실록」이라
하더라도 사관이 어느 당파 사람인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
다. 오늘날도 여당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물평과 야당의 입장에
서 바라본 인물평이 다른 것과 같은 현상인 것이다.

윤증에 대한 상반된 평가

『숙종실록』은 윤증의 생애를 배신으로 점철된 인생으로 기술했
지만 사실상 그는 한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은 인사였다. 이 말
이 그가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당시 남인·노

(老論)과 함께 3대 정당 중의 하나인 소론(少論)을 이끌었던 저
명한 정치가였다. 바로 이 때문에 『숙종실록』의 사관이 그의
생애를 혹평한 것이다. 그 사관은 반대당인 노론(老論)측 인물이
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스
승 송시열(宋時烈)과 아버지 윤선거(尹宣擧)다. 송시열은 윤증
의 스승인 동시에 정적(政敵)이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송시열과
윤증은 은원(恩怨)으로 얽힌 모순된 존재였다.
윤선거와 윤증의 관계 또한 일반적인 부자지간은 아니었다. 윤선
거는 그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자 강화도 사건이라는 평
생 씻지 못할 콤플렉스를 안겨준 모순된 존재였다.
윤증과 송시열, 그리고 윤선거 세 사람의 얽히고 설킨 드라마는
개인적인 인연에만 연유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세 사람이 엮어 가
는 이야기에는 당시 조선사회가 당면해 있던 심각한 문제에 대
한 서로 다른 해법이 담겨 있었다.
그 해법에 따른 정치적 행보는 아직까지도 윤선거와 윤증의 파평
(坡平) 윤씨와 송시열의 은진(恩津) 송씨 후손들 사이에 해결되
지 못한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송시열은 윤선거 생전에 그와 한바탕 다툰 데 이어 그의 아들 윤
증과도 크게 다투었다. 이렇게 말하면 두 집안이 대대로 원수 사
이인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송시열과 윤
선거는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 사이였다.
조선에서 동문 사이는 곧 같은 당인(黨人)임을 뜻한다. 조선 정
치의 특징 중 하나는 학통이 곧 당파를 이루는 학문정치라는 점
에 있기 때문이다.
이황의 후학들은 대체로 동인과 남인이 되고 이이의 제자들은 서
인이 되는 조선정당의 계보는 조선정치의 이런 특성에서 나온 현
상이었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한 윤선거와 송시
열이 같은 정당인 서인이었던 점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당시 서
인은 집권당이었으므로 이 두사람은 요즘으로 치면 여당인(與黨
人)들이었다.
같은 당 소속이었던 윤선거와 송시열은 사돈 사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장녀는 윤선거의 형인 문거(文擧)의 며느리, 즉 윤선거
의 조카며느리였다. 자유롭게 남녀가 교제하는 현재도 우리나라
지배층들은 혼인을 서로의 권력과 재력을 극대화시키는 유력한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부모에게 있
던 조선시대에 결혼은 곧 집안끼리의 결합이었다.
따라서 두 집안이 사돈이란 의미는 두 집안이 그만큼 가까운 사
이였다는 유력한 증거다. 같은 당파이자 사돈 사이인 가까운 관
계가 왜 악화되어 현재의 후손들에게까지 그 감정의 앙금이 남
아 있는 것일까?
윤증의 집안은 당대 최고의 학문집안이었다. 그의 집안이 당대
의 학문가였음을 말해 주는 유적은 현재도 남아 있다. 논산시 노
성면에 현존하는 종학당(宗學堂)이 바로 그곳이다. 종학당은 글
자 그대로 일가(宗)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던(學) 집(堂)이었
다. 종학당은 인조 후반기인 1640년경 윤증의 큰아버지인 윤순거
(尹舜擧)가 세운 일종의 집안 학교였다.
윤증의 일가 자제들은 눈 아래 병사저수지가 시원스레 내려다보
이는 이곳 종학당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학문을 전수받았다. 학
문 높은 집안 어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일가의 자제들이 함께
모여 배우는 종학당 학습법이 효과만점이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실제로 종학당 출신으로서 과거에 급제한 인물만 무
려 42명이었다니 그 위력을 알 만하다.
윤증의 할아버지 팔송(八松) 윤황(尹煌)은 우계(牛溪) 성혼(成
渾)의 사위였다. 성혼은 선조 때 이이와 함께 서인을 이끈 서인
의 영수였다. 윤선거는 이이의 학통을 이은 김장생의 제자였으
니 윤증의 집안은 서인의 두 영수 이이와 성혼의 양쪽 학맥을 이
은 셈이다. 즉 윤증은 한몸에 이이의 학통에다 성혼의 외손이란
두 정기를 받은 셈이자 조선 유학의 종주를 이은 셈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와 송시열·송준길 등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가장

문이 높은 학생으로 손꼽혔던 인물이다. 하지만 윤증의 어린시절
은 국가의 치욕이었던 병자호란으로 크게 영향받는다. 9살 어린
나이에 겪은 병자호란은 너무도 큰 상처를 심었고 평생의 가치관
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청나라가 침입하자 그의 아버지는 부인과 어린 남매를 이끌고 강
화도로 피란했다. 북방의 기마민족은 전통적으로 수전(水戰)에
약하다. 세계를 정복한 몽고족은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멀지 않
은 바다를 끝내 건너지 못했다. 인조도 강화도로 조정을 옮겨 기
마민족인 만주족에 맞서 장기 항전하기로 결정했다.
봉림대군과 비빈(妃嬪)들은 미리 강화도로 들어갔고 윤선거 같
은 양반 가문들도 강화도로 피신했다. 문제는 정작 인조가 강화
도로 피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려다 길
이 끊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인조 14년인 병자년, 바람도 찬 12월이었다. 이 바람에 무수한
이산가족이 생겼다. 왕실과 많은 양반가족들이 이산가족이 되었
다. 윤증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윤증의 할아버지인 윤황이 인조
와 함께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다.
아버지 윤선거는 강화도에서 친구 권순장·김익겸과 함께 청군

상륙하면 의병을 일으켜 순절(殉節)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김
포를 거쳐 갑문(閘門)을 통해 상륙한 청군이 삽시간에 밀려들면
서 조선군은 대응 한번 제대로 못하고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성은 어느새 청군으로 뒤덮였다.
이때 순절을 약속했던 윤선거의 두 친구는 김상용이 분신하자 그
들도 따라서 죽었다. 그러나 윤선거는 약속대로 죽지 않고 봉림
대군(훗날의 효종)의 명으로 남한산성에 파견되던 침원군(琛原
君) 이세완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했다. 이 사건이 훗날 송시열
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 사이에 의리론을 두고 벌어지는 「회니시
비」(懷泥是非)의 논쟁거리가 된다.
자결한 것은 윤선거의 두 친구뿐이 아니었다. 윤증의 어머니 이
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637년 정월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
하자 시세가 급박해졌다. 윤선거는 사우(士友)들과 앞으로의 처
신을 논의하고 있는데 부인 이씨가 여종을 보내왔다.
윤선거를 만난 부인 이씨는 『적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스스로 자
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뵙고 결별하려
고 오시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자결했다.
윤선거는 부인을 말릴 수도, 그 의지를 칭찬할 수도 없는 곤란
한 입장이어서 차마 부인의 자결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친구들
이 있는 곳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