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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면 대명리 두레 게시판 상세보기

[논산문화원] - 민속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상월면 대명리 두레
작성자 논산문화원 등록일 2001-11-22 조회 1109
첨부  
 
상월면 대명리는 계룡산 국사봉과 향적산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여섯개 마을 130호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은 뒷편은 계룡산이 막아주고 있고 마을 앞뒤로 개울이
흐르는데 이곳에선 "앞갱변" "뒷갱변"이라 부른다.

여섯 마을은 별바우, 강거름, 벌뜸, 깊은구렁, 검은점, 긴등 이
란 옛날 이름을 갖고 있고 지금도 그렇게 불린다. 이 마을의 농
기에는 "神農道業"이라 새겨 있고 기가 가로로 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예전에는 세로기 보다는 가로기가 많았고
기의 세 테두리를 장식하는 "지네발"이나 깃대 꼭대기를 꿩털로
모양을 내는 "꿩장목"같은 것으로 한껏 멋을 내었다.

용을 그려넣은 농지도 많았고 그냥 "農"자 하나를 큼지막하게
써 넣기도 했다하며 일제 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그중 많았던 것
이 "新農道業"이라고 쓴 가로기였다고 한다. 대명리 두레는 1905
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대명리는 여섯마을이지만 두레는 하나로 조직되었다.
두레의 우두머리는 좌상으로 그날 일을 명령하고 통제한다. 두레
는 논농사의 가장 힘든 대목인 김매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내기를 한뒤 보름뒤에 초벌 김매기를 한다. 이 초벌매기 직전
에 두레가 모아진다.
초벌매기를 아시매기라고도 하는데 흙을 호미로 파서 뒤집는 일
이다.
초벌매기를 한 후 10일 이내에 두벌매기를 하고, 10일 뒤에 하
는 세번째 김매기를 만물이라고 한다.
만물은 호미로 파는것이 아니고 손으로 풀을 뽑고 마구 문지르
는 식으로 김을 맨다.
이 마을에서는 두레가 날때에는 원래는 지금 방앗간 자리에 있
던 세그루 정자나무레 깃대를 세워 두면 마을 사람들이 빠짐없
이 나왔다고 한다.

농기가 세워지면 꽹과리, 장고, 북, 징 등의 농악기로 풍장을 쳐
댄다.
농군들이 다 모이면 좌상의 지시에 따라 논매기를 하러간다.
김매기를 할 논두렁 옆에 농기를 세우고 한마당 풍장을 친다.
한 사람이 "원래 한잔씩 해장을 하고 논에 들어가는 거여"하자
마을 아낙들이 뒤따라 이고온 막걸리 동이를 마을 사람들이 둘러
싼다.

좌상이 김매기를 지시하면 풍물잡이들이 논으로 들어가 풍장을
치면 논둑에 서있던 농부들이 논으로 들어가서 김을 메는데 금
새 반달 모양의 대형을 이루면서 선소리꾼의 소리를 받아 넘긴
다.
이때 하는 소리를 "바심(지심) 소리"라 하는데 선소리꾼이 "왔
네" 한다.
이어서 선소리가 "아하 헤에" 하면 일꾼들이 이 소리를 그대로
받아준다.
"에어아 에에야 오호라 디어아 헤에" 대목은 선소리꾼과 일꾼들
이 같이 하고 "저건너 남매봉" "뒤돌아 들온다" "풍물을 하여
라"에서 끝난다.

대명리에서는 호미로 김맬때 부르는 노동요로 "얼카사니"가 있는
데 "얼카사니야, 얼카사니야, 오작교 다리가" 하는 식으로 선소
리가 나오면 일꾼들이 따라한다.
각 논매기의 김매기는 "쌈소리"와 함께 끝난다.
풍물이 빠져 나가면 반달 모양의 대형이 원을 그리고 "우이 하
아, 우이 하아"하는 "후이소리"를 한다.

옛날에는 두레를 매러 가다가 이웃 두레와 마주치기도 했다.
큰 두레를 만난 작은 두레는 농기를 숙여 인사를 했는데 이때 인
사가 불손하면 두레싸움이 일어났다.
이 만물 두레가 끝나면 7월 백중이면 두레가 다시 모여 두레를
먹는데 농기 아래에서 하루종일 풍장을 치며 먹고 논다.

그 대표적인 놀이가 무형문화제 제74호로 지정된 연산 백중놀이
이다.
대명리 두레는 짐굿으로 끝난다. 큰집으로 들어간 풍물잡이들은
풍장을 치며 장꽝, 부엌 그리고 우물에서 풍물을 치는 것으로 끝
이난다.

두레는 힘겨운 논농사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공동으로 김메기 하
던 우리 고유의 풍습으로 농촌 어느 곳이나 쉽게 볼 수 있었던
대표적 민속이었다.
옛 사람들은 두레를 논에서 끝내지 않고 마을과 집안으로 연결시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