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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리(陽村里) 게시판 상세보기

[논산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양촌리(陽村里)
작성자 논산문화원 등록일 2002-05-08 조회 778
첨부  
 
은진군 갈마면(葛麻面)의 지역이었는데 마을이 양지쪽에 있어
서 양지편 또는 양촌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촌리(蘆村里), 가정리(柯亭里), 동구리(洞口里)의 각 일부와
전라북도 고산군 운벅면의 구만리(九萬里) 일부를 병합하여 양촌
리라 하고 가야곡면에 편입되었다. 그후 1983년2월15일 양촌리
일부인 노촌과 동구리가 양촌면 중산리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양촌1리로 되어 있으며, 인구는 70세대에 225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1993.12.31 현재) 자연부락은 가정, 감나
무골, 구리개, 양지편 등이 있다.

▶자연부락 및 지명유래

가정(柯亭)[마을] : 양촌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약 250년전에 고
산 현감을 지낸 조씨가 처음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마
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조씨가 여기에 자리 잡을 때에도 큰 느
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 정자를 이루고 있었다 하여 가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정리(柯亭里)[마을] : 가정이라고 하며 양촌 서쪽에 있는 마을
이다.
감나무골[마을] : 양촌 남쪽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감나무가 많이 있다해서 감나무골 또는 시전이라고 부른다 한다.
구노현(九老峴)[마을] : 가정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구리개라고
도 한다.
구루개[마을] : 구리개 또는 구노현이라고도 하며 가정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리개[마을] : 가정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매죽헌 성삼문의 묘가
있다. 개 아홉 마리가 밥을 먹고 있는 형국이라 하며 구루개 또
는 구노현이라고도 한다.
사송재(思松)[고개] : 구리개 서쪽에 있는 고개인데 사육신의 하
나의 성삼문의 시체를 될 수 있는대로 한양에서 멀리 버리라 하
여 한 지게꾼이 성삼문의 일지체를 여기까지 지고 와서 버리고
가 이곳에 성삼문의 묘소를 썼다 한다. 성삼문의 송죽같은 충의
를 사모하여 이 고개를 사송재 또는 사송리, 성삼문대라고도 부
른다.
사송티(思松峙)[고개] : 사송재라고도 하며 구리재 서쪽에 있는
고개이다.
성삼문재[고개] : 사송재, 사송티라고도 하며 구리개 서쪽에 있
는 고개이다.
성삼문묘소(成三門墓所)[묘] : 수청거리에 매죽헌 성삼문묘가 있
는데 일지체가 묻혀있다고 한다.
수청거리[길] : 구리개 앞에 있는 길거리로 여기에는 옛날부터
숲이 많이 우거져 있어서 숲정거리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수청거
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숲정거리[길] : 수청거리 또는 숲정이라고도 하는데 예부터 숲
이 많이 우거져 있어 숲정거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숲정이[길] : 구리개 앞에 있는 길거리로 수청거리라고도 한다.
시전(柿田)[마을] : 감나무골이라고도 하는데 양촌 남쪽
산골짜
기에 있는 마을이다.
양지편(陽地便)[마을] :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양지편 또
는 양촌이라 하였다 한다.
양촌(陽村)[마을] : 양지편이라고도 한다.
하마비(下馬碑)[비] : 매죽헌 성삼문묘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말
이나 가마에서 내려서 걸어가라고 하마비를 세웠다 한다.

▶성삼문재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으니 이수양대군
이 곧 세조이다. 이때 예방승지로 있던 성삼문은 옥세를 끌어 안
고 대성 통곡을 하였다. 그후 성삼문 등은 단종의 복위를 위해
거사 계획을 세우다가 김질의 배반으로 탄로가 나 형장의 이슬
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 분들이 곧 사육신이다.
그들의 시신은 쪼개어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버리라는 명
이 내려졌다. 그때 성삼문의 시신을 지고 가던 인부가 이곳 지금
의 양촌리까지 와서
「에잇, 무겁고 귀찮아 아무데나 버릴까?」
하며 투덜거리자 시체에서 말하기를
「아무데나 버려라.」
하여 그 인부는 지게마저 내 팽개친 채 도망쳐 갔다, 그래서 여
기에 묘를 썼는데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니 이는 성삼문의 충
의를 말하는 것이라 하여「사송치(思松峙)」라 부르게 되었고,
성삼문의 일지체가 묻혀있는 고개라 하여「성삼문재」라 부른다
고 한다.

*참고-論山地域의 地名由來(1994년12월25일,논산문화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