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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산리(彩山里) 게시판 상세보기

[논산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채산리(彩山里)
작성자 논산문화원 등록일 2002-05-09 조회 972
첨부 jpg m20051005143011.jpg
은진군 채운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채
산리(彩山里), 학동(鶴洞), 작지리(鵲旨里), 양촌리(陽村里), 성
북리(城北里)를 병합하여 왜식 이름으로 금정(錦町)이라 하고 논
산군 강경면에 편입되었다가, 1931년 강경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강경읍에 소속되어 오다가, 1947년 왜식 동면 변경으로 채
운산의 이름을 따서 채산동이라 하였다. 1988년8월1일 동을 리
로 고쳐 채산리라 부르게 되었다.

행정구역은 채산1, 2, 3, 4, 5리로 되어 있으며 인구는 851세대
에 3,015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1993.12.31 현재) 자연부락
은 까치말, 남청이, 분톳골, 잣디, 양촌, 채산, 학동 등이 있다.

▶자연부락 및 지명유래

까치말[마을] : 양촌 옆에 있는 마을로 옛날 마을 뒷산에 나무
가 울창하여 까치떼가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까치말 또는 작지
라 부른다 한다.
남청이[마을] : 분톳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아주 서늘하여 양정(양정)이라 불렀는데 변하여 남청이
로 되었다고 한다.
동헌터(東軒)[터] : 양촌 즉 채산리 216번지에 있는 채운향의 터
이다.
둔병소(屯兵所)[산] : 임진왜란때 중봉 조헌이 의병을 거느리고
지나가다가 이곳 채운산에 둔병(둔병)하였다하여 둔병소라고도
한다.
분토골[마을] : 분톳골 또는 토동이라고도 하며 까치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분톳골[마을] : 까치말 서쪽에 있는 마을로 부근에서 분토(분토)
가 많이 나와서 분톳골이라 하였고 변하여 분토골 또는 토동(토
동)이라고도 부른다.
성북(城北)[마을] : 채운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잣디라고도 부
른다.
양정(涼亭)[마을] : 분톳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남정이라
고도 부
른다.
양촌[마을] : 채산리와 산양리에 설쳐있는 마을로 뒤에 채운산
이 있고 옛날 채운향의 터이다. 새롭게 빛이 돗는 마을이라 하
여 양촌이라 부른다.
옥터(獄)[터] : 동헌터 동쪽에 있는 채운향의 옥(옥)터이다.
용암사(聳岩寺)[절] : 채운산 동쪽에 있는 절로 전에는 옥녀봉
밑에 있었는데 부처의 가르침에 의해 현위지오 1920년에 이건하
였다.
작지(鵲旨)[마을] : 양촌 옆에 있는 마을로 까치말이라고도 부른
다.
잣뒤[마을] : 잣뒤라고도 하며, 채운산 동남에 있는 마을이다.
잣디[마을] : 채운산 재넘어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채운향의 성
뒤쪽에 있어 잣뒤, 잣디 또는 성북(성북)이라고도 하는데 변하
여 척티(척티)라 부르기도 한다.
정수지(淨水池)[저수지] : 채산리에 있는 저수지로 1917년에 시
설되었다.
채산(彩山)[마을] : 채운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척티(尺峙)[마을] : 잣디 또는 성북이라고도 하며 채운산 동남쪽
에 있는 마을이다.
토동(兎洞)[마을] : 분톳골이라고도 하며 까치말 서쪽에 있는 마
을이다.
학동(鶴洞)[마을] : 채산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채운산(彩雲山)[산] : 채산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 234m로 그 밑
에 채운향이 있었고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이 의병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상송하여 둔병한 곳이라 하여 둔병소(둔병소)라고도 한
다.

▶채운산(彩雲山)

강경읍 채산리에 채운산이 있다. 해발234m로 옛날에는 산밑에
채운향(彩雲鄕)이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중봉(重峰), 조헌
(趙憲)이 의병을 거느리고 지나가다가 이곳에서 상소하여 둔병
(屯兵)한 곳이라 하여 둔병소(屯兵所)라고도 한다.
백제때에는 왕족이 이곳에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후백
제 때에는 지네와 용의 승천으로 온노을이 빨개 졌다는 등의 전
설을 간직한 산이기도 하다.

▶채운산(彩雲山)에 내린 다섯 선녀와 오화지지

옛날 다섯 선녀가 땅으로 내려와 씨앗을 퍼뜨리고 올라오라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채운산에 내려 왔다. 다섯선녀는 넓은 들
을 따라 가다가 지금의 채운지방에 와서 한선녀는 용꽃이 많이
핀다는 지금의 용화리 쪽으로 갔고, 한선녀는 배꽃이 많이 핀다
는 신화리(연무읍)쪽으로, 또한 선녀는 매꽃이 많이 피는 화산리
로 또 한 선녀는 들꽃이 많이 피는 야화리로 또 한 선녀는 산꽃
이 많이 피는 화정리 쪽으로 갔다.
이들은 각각 헤어져 뗏집을 짓고 남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용꽃선녀는 노래를 부르며 하루하루를 보냈고, 들꽃 선녀는 춤
을 추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한편 배꽃선녀와 매꽃선녀는 열심
히 일을 하였다. 하지만 산꽃선녀는 어디서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산꽃선녀와 배꽃선녀,
매꽃선녀는 남자를 만나 아들 딸을 낳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놀기만 좋아하던 용꽃선녀와 들꽃선녀는 남자를 만나지 못한채
하늘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긴 했지만 왕궁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고 한다. 채운산 아래에 씨를 뿌린 자손들은 번창해 갔고 그래
서 여기 사람들은 선녀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백일기도 끝에 채운이를 낳게 한 채운산(彩雲山)

이조 초엽때이다. 청양 정산고을에 황진사라는 사람이 살고 있
었다. 생활은 여유가 있었으나 자식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 부인
은 채운산에 있느 용암사에 와서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러후 부
인은 태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는데 딸이었다. 이름도 채운이라
지었다. 채운이가 여덟살 때 어머니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세
상을 떠나고 말았다.
황진사는 새아내를 맞이했다. 새어머니는 남편에게는 잘 했으
나 채운이에게는 잘하는 척만 했다. 채운이는 곱게 잘자라 전라
도 해남에 사는 이진사댁 도령과 약혼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이
었다. 새어머니는 채운이가 낙태르 했다고 노발대발 하는 것이었
다. 아버지는 채운이를 때질까지 하여 가죽푸대에 넣어 강물에
띄웠다. 가죽푸대는 떠내려 가다가 황산나루에 고기를 잡던 어부
에게 건져졌다. 채운이의 슬픈 사정 얘기를 들은 어부는 채운이
를 해남의 이진사댁으로 실어다 주고 사정 얘기를 다하였다.
이진사는 채운이의 얘기를 듣고 며느리로 맞이했다. 그후 이도
령은 과거에 급제하여 양주목사가 되어 올라오는 길에 황진사댁
으로 와서 계모에게
「계모는 지은죄가 너무나 크니 채운산으로 들어가 죄를 빌도록
하시오.」
하고는 부임지로 떠났다. 그후 계모는 채운산에 들어갔으나 흑심
이 영영 풀리지 않아 나오지 못하고 늙어 죽었다고 한다.

*참고-論山地域의 地名由來(1994년12월25일,논산문화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