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왕전리(旺田里)-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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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논산문화원 | 등록일 | 2002-05-09 | 조회 | 8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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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전리의 가는 샘
왕전1리 마을앞에 가는샘이라는 우물이 있다. 고려 초엽때의 일 이다. 노승 한 사람이 이 우물에서 한참동안 염불을 외우더니 「금년에는 가뭄으로 흉년이 들고, 내년에는 큰 난리가 날 것이 요, 이 마을은 이 우물을 계속 품어내어 논에 물을 대시오.」 하고는 어디로인지 가버렸다. 그후 노승의 말대로 가뭄이 극심했다. 그러나 이마을사람들은 이우물 덕분에 가뭄 피해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후백제와 고려와의 싸움이 벌어져 고려 의 승리로 싸움은 끝이 났다. 고려의 군사들이 이 마을을 지나 게 되었다. 그때 고려의 한 장수가 이 우물에와서 물을 긷고 있 는 처녀에게 물을 청하자 처녀는 물 한바가지를 푸더니 버드나 무 잎을 따서 띄워주는 것이었다. 장군은 버드나무 잎을 후후 불 면서 물을 다 마시고는 「낭자! 어찌하여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웠소?」 하고 물었다. 처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장군님은 몹시 갈증을 느끼신 것 같은데 아무리 목이 마르다 해도 급히 물을 드시면 체하실까 싶어서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정군은 처녀의 뜻이 몹시도 기특했다. 그 래서 장군은 허허 웃으면서 「잘 마셨소, 나는 가요. 한번 찾아오리다」 하는 말을 남기고 길을 떠났다. 그후 이샘은 장군이「나는가요」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해서「가는샘」또는 「간샘」이라 부르 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처녀는 장군이 찾아온다는 말을 믿고 기다리다가 노처녀 로 죽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은 시신을 가대골 산에 장사 지내었 다. 오랜 세월이 흘러간 어느날 그 장군이 찾아 왔지만 처녀는 장사 지낸지 오래였다. 장군은 자기를 기다리다 노처녀로 죽었다 는 말을 듣고 애처롭게 생각하며 가대골 산밑에 사당을 짓고, 논 4,000평을 주어 제사 지내게 했다고 한다. 지금은 사당은 없 어졌지만 제물을 마련하던 논은 지금도 사당논이라고 부르고 있 다. ▶말머리 왕전3리를 말머리 또는 마두라고 부른다. 옛날 전라도 땅에 한 선비가 과거를 보기 위해 걸어서 한양길 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금의 풋개까지 왔을 때는 과거날짜는 내 일로 임박했고 발은 물집이 생겨 피가 줄줄 흘러내려 한 발자욱 도 더 걸을수가 없어 털썩 주저 앉으면서 「이럴 때 말이라도 한필 있다면 과거시간에 닿으련만...」 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고보니 산모퉁이에 백 마의 머리 하나가 보였다. 선비는 그곳으로 달려가 말을 타고 쏜살같이 한양으로 향하였 다. 선비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부임 지로 가면서 말이 나타났던 선모퉁이로 가보았지만 말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말머리가 나타났던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말 머리」또는「마두」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이런 전설도 있다. 전라도 영암사는 양득중(양득중)이란 선 비가 훌륭한 스승을 찾아 충청도에 오게 되었다. 충청동 땅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과 맹재 윤증선생이 있었다. 이때 우암 송시열 선생은 전라도에서 선비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제자 한 사람을 풋 개 갈림길에 내보내어 말머리를 회덕쪽으로 돌리면 정중히 모셔 오라고 하였다. 이곳에 도착한 선비는 갈림길에서 마을 멈추고 한동안 망설이더 니 노성의 명재 선생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후 양득중은 공 주 덕촌에 이사하여 윤증의 문인이 되었고 벼슬은 동부승지에 이 르렀다. 이따 양득중이 말러리를 명재쪽으로 돌린곳이라 하여 이때부터 말머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참고-論山地域의 地名由來(1994년12월25일,논산문화원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