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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촌리(校村里)-1 게시판 상세보기

[논산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교촌리(校村里)-1
작성자 논산문화원 등록일 2002-05-09 조회 937
첨부  
 
노성군 읍내면(邑內面)의 지역을 노성향교가 있어서 향교말, 또
는 교촌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新村),
죽촌(竹村), 천아동(天牙洞)의 각 일부와 하도면(下道面)의 주막
리(酒幕里)일부를 병합하여 교촌리라 하고 논산군 노성면에 편입
되었다.

행정구역은 교촌1리로 되어 있으며, 인구는 134세대에 449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1993.12.31 현재) 자연부락은 앞술막, 천
아수골, 향교말 등이 있다.

▶자연부락 및 지명유래

교촌(校村)[마을] : 교촌리라고도 하며 노성향교가 있으므로 향
교말 또는 교촌이라 하였다.
교촌리(校村里)[마을] : 교촌이라고도 한다.
구앞술막[마을] : 향교말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주막이
있었다 하여 주막거리 또는 전주막이라고도 부른다.
궐리사(闕里祠)[고적] : 공자를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춘추사(春
秋祠)라고도 부르며 1716년(숙종42년)에 건립하여 공자의 영정
과 송조5현의 연정을 모시고 춘추로 제사를 지낸다.
노성향교(魯城鄕校)[고적] : 송당리 월명곡에 있었는데 현 위치
로 이건하였다. 창건 연대와 이건연대는 알 수 없고 현재 5성
(聖) 20현(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아흔아홉모랭이[모랭이] : 교촌리를 지나 하도리와 상월면, 광석
면에 이르는 삼남대로에 꼬불꼬불한 산모랭이가 99개소가 있다
고 한다.
앞술막[마을] : 구앞술막, 주막거리가고도 하며 향교말 남동쪽
에 있는 마을이다.
여단터[터] : 궐리사 동북쪽에 있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제사
지내는 여단(厲壇)의 터로 여제단터라고도 한다.
여제단터[터] : 여단터라고도 하며 무주고혼을 제사지내던 여단
의 터이다.
열녀문(烈女門)[정려] : 윤증 고택 앞에 있는 정려로 윤증 선갱
의 어머니 공주 이씨 정려이다.
옥천말랭이[산] : 현 노성중학교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 홍수
로 옥천에 떠내려 왔다고 전한다.
옥천뫼[산] : 옥천말랭이라고도 하며 현 노성중학교 동쪽에 있
는 산이다.
옥녀봉(玉女峯)[산] : 노성중학교 뒤에 있는 산으로 옥녀탄금형
(玉女彈琴形)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장승뱅이[마을] : 앞술막을 말하는데 옛날 윗장승과 아랫장승이
있었다고 한다.
전주막(前酒幕)[마을] : 구 앞술막이라고도 하며 향교말 남동쪽
에 있는 마을이다.
주막거리[마을] : 앞술막, 전주막이라고도 하며 옛날 주막이 있
었다고 한다.
천아동(天牙洞)[마을] : 천아수골이라고도 하며 향교말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천아수골(天鴉)[마을] : 향교말 동쪽에 있는 마을로 천아탁시형
(天鴉啄屍形)의 명당이 있다고 하며 천아동이라고도 부른다.
춘추사(春秋祠)[고적] ; 궐리사라고도 하며 공자를 비롯한 송조5
현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향교말[마을] : 교촌리라고도 부른다.

▶진상품 노성 참게

노성면 교촌리 노성천 일대에서 잡히는 참게는 옛날 왕에게 올
렸던 진상품으로 유명하다.
노성참게는 게의 등판이 넓고 단단하여 가을이 되면 완전히 장
이 몸에 꽉차서 뚜껑을 떼어보면 샛노란 게장이 들어 있는데 이
것이 첨게의 대표적인 맛을 낸다.
노성게는 조선 성종때 지은 동국여지승람 공주목 이산현 특산
물 항목에도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 이전부터 유명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주막거리 앞술막과 동치미

노성면 교촌리 앞술막을 주막거리라고도 한다. 이곳은 옛날 전
라도 지방에서 한양가던 큰 길가였다. 이곳에 돈만 아는 지독한
주모가 있었다. 솜씨가 좋아서 이 집만은 손님의 발길이 끊이질
앖았다. 주위의 주막들은 거의 문을 닫게 되었다. 주모는
술 안
주로 동치미인 통무우에 국물만 부어 내놓기 시작했다. 다른 주
막집도 없으니 그래도 손님은 이주막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점
젆은 선비들이 큰 동치미를 들고 먹을 수도 없고 하여 국
물만 마
시고 갔다. 주모는 여기에 국물만 부어 또다시 술안주로 내 놓았
다.
그러던 어느날 전라도의 한 선비가 이 말을 듣고 손 칼 하나를
가지고 와서 굴은 한잔만 청하고 칼로 무만을 썰어 요기를 한
후 술 한잔 값을 내고 갔다. 그는 한양을 가면서 내려오는 길손
들에게 손칼을 가지고 가라고 일렀다. 찾아오는 길손마다 술은
한잔만 마시고 동치미 무만 먹고 갔다. 주모는 그때서야 잘못을
뉘우치고 안주를 톡톡히 내놓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안주가 시
원찮으면「앞술막 술안주인데」하며 씁쓸해 한다고 한다.

▶물고기와 어부

노성면 교촌리에 노부부가 경영하는 주막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매일 앞냇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술안주로 내어 놓았다. 어는
날 이었다. 그날도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강변으로 나갔는데 거기
에는 처음보는 백발노인들이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보더니
「이곳의 물고기는 선객의 물고기이니 이제는 물고기를 그만 잡
도록 하시오」
하고는 빗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 노인은 그후부터 물고기를 잡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도 노성천의 물고기는 냄새가 안나고 맛이 일품이데 이것은 그
신성한 물고기가 여기에서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성의 옥천땅 옥천 말랭이

오성면 교촌리 노성중학교 동쪽으로 100m정도에 옥천말랭이라
고 하는 야산이 있다.
옛날 어느해 옥천땅에 대홍수가 나서 물난리를 겪게 되었다. 주
민들은 물을 피해 산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산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둥실둥실 떠내려가 노성땅에 와서 멎었다. 사람들은
이곳이 내 땅이거니 생각하고 몸담아 살면서 자기들은 옥천사람
이라 하였고 세금도 옥천 관리에게 받쳤다.
그러던 어느해 노성땅에 신억이란 젊은 현감이 부임해 왔다.
그 현감은 세금을 걷고 있는 옥천 관리들을 불러놓고
「세금은 옥천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들은 노성땅을 밟았으니 통
행세를 받아야 하겠다」
하고는 세금을 받은 것을 모두 압수하고는 동산을 짚으로 두르
게 하고 불을 질러 버렸다. 그리고는
「보다시피 옥천땅은 불에 타 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남아 있
는 곳은 노성땅이렸다. 앞으로 이땅의 세금은 내가 걷겠다. 」
하고 말했다. 그후부터 세금은 노성에서 받게 되었다고 하며 이
산을 지금도「옥천말랭이」또는「옥천뫼」라고 부르고 있다.

*참고-論山地域의 地名由來(1994년12월25일,논산문화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