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중산리(中山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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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논산문화원 | 등록일 | 2002-05-21 | 조회 | 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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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군 상두면(上豆面)의 지역으로 중산(中山) 밑에 있다하여
중산, 중재 또는 중티(中峙)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우항리(牛項里), 동구리(洞口里) 일부를 병합하여 중산리 라 하고 논산군 가야곡면에 편입하였다가 1983년2월15일 가야곡 면의 양촌리 일부(노촌, 동구리마을)와 함께 양촌면 중산리로 편 입되었으며 고려때의 사찰인 쌍계사가 있다. 행정구역은 중산 1, 2, 3리로 되어 있으며, 인구는 163세대에 64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1993.12.31 현재) 자연부락은 사 라니, 쇠목, 절골, 동구리, 노촌 등이 있다. ▶자연부락 및 지명유래 갈내[마을] : 노촌이라고도 하며 동구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강병흠, 평택임씨정려[정려] : 중산리 산99번지에 있는 효자 강 병흠은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시묘살이를 하면서 옷자락에 돌을 담고 다니며 고행을 하여 포석효자(抱石孝子)라고도 하였으며, 그의 부인 평택임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자결 남편의 뒤를 따랐다. 까치재[고개] : 우항리에서 전북 완주군 화산면 까치말로 넘어가 는 높은 고개로 옛날에는 도적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하며 6.25때 는 공비들이 은거하였다고 한다. 깃대봉[산] : 황산 서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119m로 토지측량 표준기가 있다. 노천[마을] : 노촌이라고도 하며 동구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노촌(盧村)[마을] : 동구리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300여년전에 백씨들이 갈대밭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룩했다하여 노촌이라 부른 다 하며 냇물이 흘러 갈내 또는 노천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가야곡면 양촌리에 속하였는데 1983년2월15일 가야곡 중산 리가 양촌면으로 현입될 때 중산리에 편입 양촌면 중산리에 속하 게 되었다. 피재[고개] : 우항리에서 전북 완주군 운주면 승티리로 넘어가 는 고개로 승티라고도 한다. 동구리(洞口里)[마을] : 노촌 남쪽에 있는 마을로 쌍계사로 들어 가는 동구가 되므로 동구리라 하였다. 가야곡면 양촌리에 속하였 는데 1983년2월15일 가야곡면 중산리가 양촌면으로 편입할 때 노 촌마을과 함께 중산리에 딸리어 양촌면 중산리에 편입되었다. 백암사(白岩寺)[절] : 지금의 쌍계사를 옛날에 백암사라고 하였 다. 사곡(寺谷)[마을] : 절골이라고도 하는데 중산 동남쪽에 있는 마 을이다. 사라니[마을] : 중산 남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중산의 안쪽이 되 므로 산안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사라니 또는 산내리라고도 부른 다. 산내리(山內里)[마을] : 사라니라고도 하며 중산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산안[마을] : 사리니라고도 하며 중산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산안이라 부른다. 쇠묵[마을] : 사라니 남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의 뒷산 형태 가 마치 소의 목같이 생겼다하여 쇠목 또는 우항리라고도 부른 다. 승티(升峙)[고개] : 피재라고도 하는데 우항리에서 운주면 승티 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쌍계사(雙溪寺)[절] : 중산리 절골 불명산 아래에 있는 절로 백 암사라고도 하였으며 고려 충숙왕때 행촌 이암이 창건라고 목은 이 기(記)를 지었다. 영조때 중수하였고 대웅전의 문은 꽃무늬 를 새기었으며, 1964년9월 보물 제408호로 지정되었다. 쌍계사부도(雙溪寺浮屠)[부도] : 중산리 13번지 쌍계사 입구에 부도가 있다. 모두 9기가 있다. 쌍계사중건비(雙溪寺重建碑)[비] : 쌍계사에 중건비가 있다. 자 연석 기단위에 장방형의 비신이 있으며 정상에 가첨석이 올려져 있다. 비신에는「쌍계사 중건비명(雙溪寺 重建碑銘)」이라 전각 (篆刻)되어 있고 김락중이 찬(撰)하고, 이화중이 글씨를 썼으며 김락조가 전(篆)을 하였다. 이 중건비는 1739년(조선영조 15년) 에 세웠다. 우항(牛項)[마을] : 쇠목이라고도 하는데 사라니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우항리(牛項里)[마을] : 쇠목 또는 우항이라고도 한다. 작티(鵲峙)[고개] : 까치재라고도 하는데 우항리에서 운주면 승 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절골[마을] : 중산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쌍계사 입구에 있다. 현재는 30여호 밖에 없으나 쌍계사의 전성기 고려때에는 여기를 찾아드는 신도들이 자리잡고 살아 큰 부락이었다고 한다. 절이 있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절골 또는 사곡이라 부 른다고 한다. 중산(中山)[마을] : 중산리를 말한다. 중재[마을] : 중산리를 중재라고도 한다. 중티(中峙)[마을] : 중산리를 중티라고도 한다. 해주오씨열녀비(海州吳氏烈女碑)[비] : 오씨부인은 남편 강영원 이 화를 당하여 비명에 죽자 단식하여 순절하여 강씨 문중에서 1952년경에 중산리에 열녀비를 세웠다. ▶쌍계사와 하마비(下馬碑) 양촌면 중산리에 자리잡고 있는 쌍계사자리는 하늘의 상제(上 帝)가 자리잡아 주었다고 전한다. 옛날 상제의 아들이 이땅에 내 려와 진귀한 나무들을 선택하여 절을 지었다고 한다. 고려말엽, 나라에는 큰 화가 일어나 도망다니는 사람들이 쌍계 사에 숨어 들어왔다. 이 소문을 들은 군사들이 쌍계사로 오고 있 었다. 그때 주지스님의 그들 앞에 나가 불경을 외우니 군사들이 타고 왔던 말들이 앞다리를 번쩍들며 기성을 지르면서 그 자리 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을 몰던 군사들도 말에서 떨어 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쌍계사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고, 그 후 말이 쓰러진 곳에 하마비를 세워 말에서 내려 절간으로 걸어 서 가게 했다고 한다. ▶중산리의 장군 할아버지와 바위 양촌면 중산2리 새목 마을 입구에서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는 데 그 밑에 넓은 바위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엔 힘이 장사인 유씨라는 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느티나무 정자 아래에서 노인들이 맨바닥에서 누워 있 는 것을 보고 중고개를 넘어 성삼문의 묘소가 있는 골짜기에 놓 여 있던 바위를 혼자서 마을 입구 느티나무 정자 아래에 갖다 놓 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이 할아버지를 장군 할아 버지라 부른다고 한다. *참고-論山地域의 地名由來(1994년12월25일,논산문화원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