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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광리(彩光里)-2 게시판 상세보기

[논산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채광리(彩光里)-2
작성자 논산문화원 등록일 2002-05-21 조회 1040
첨부  
 
▶할매바위

양촌면 채광리 새터에 할매바위라고 하는 바위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할머니 한분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꿈속에 산
신령이 나타나서
「둘째 손자가 장차 무관이 될터이니 탑을 쌓고 정성을 다하여
산신령께 빌어라.」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그날부터 탑을 쌓기 시작하였다. 둘째
손자는 장성하여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세월이 지나 손자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이 놓아갔고, 할
머니는 손자를 위하여 탑을 쌓는 일을 계속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할머니는 탑을 쌓고 있는데 병사들이 찾아와서
「장군께서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슬픔을 감추지 못하면서 돌을 탑
위에 올려 놓았다. 그때였다.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돌더미에 묻혀 죽었고, 그뒤 그 가문에서는 장수가 이
어서 나왔다고 한다. 할머니가 성을 쌓던 곳에는 큰 바위가 있는
데 이 바위를 할매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물의 흐름을 옮긴 수락(水落)

양촌면 채광리 밑에 수락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다. 옛날 이 마
을에 인색한 부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스님 한분이
찾아와서 시주를 청했지만 시주를 할리 없었다. 오히려 욕설까
지 하며 내쫓는 것이었다. 스님은 돌아서면서
「당신네는 이 강줄기만 옮기면 더 부자가 될텐데...」
혼자 중얼거리며 떠나갔다. 이 말을 들은 인색한 부자는 더 부자
가 되고 싶은 욕심으로 일꾼들을 시켜 강줄기의 방향을 다른 곳
으로 옯겼다. 그후 그 부자는 점점 망해갔다. 그래서 그후부터
물 방향을 옯겨 물이 떨어졌다 하여 수락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옥동자를 얻은 채동(彩洞)

양촌면 채광리에 채동이란 마을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유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생활은 넉넉했지만 아들 하나 없는 것이 걱
정이었다. 유씨부인이 불공을 드린지 1년이 되는날 꿈속에 한 선
인(仙人)이 나타나서
「부인의 정성이 갸륵하도다. 용암산 할미바위 밑에 파릇한 산나
물이 있을테니 그것을 다려먹으면 자식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부인은 날이 밝자, 할미바위 밑에 나있는
나물을 뜯어다가 다려 먹고 옥동자를 낳아 훌륭하게 키워 나라
의 큰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물을 다려먹고 옥동자를
얻게 되었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명당자리 새터

옛날 중국의 한 지관이 조상의 유골을 가지고 명당자리를 찾고
다니다가 이곳 채광리까지 와서 새가 하늘을 치솟는 듯한 형태
의 명당자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는 맥을 찾아 새알을 그
곳에 묻으니 새알은 금방 부화되어 훨훨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내일 날이 밝으면 그곳에 묘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 이
튿날 그곳에 가보니 누군가의 묘가 써져 있었다. 지관의 말을 먼
곳에서 엿듣던 한 농부가 명당자리라는 말을 듣고 새벽에 묘를
썼던 것이다. 그래서 그 지관은 평생동안 한탄하다가 이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후 그가 발견했던 명당자리는 새가 되어 날아
갔다 하여「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햇빛이 반사되는 명당자리 광달(光達)

양촌면 채광리에 광달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다. 옛날 한 지관
이 조상의 묘를 쓰기 위해 명당자리를 찾다가 이곳에 와서 보고
깜짝 놀랐다. 대둔산 정상에 내리는 햇빛이 반사되어 이 마을 냇
물이 윤기있게 흐르는 것을 보고 지관은 햇빛이 반사되는 곳에
묘를 썼다.

그후 지관의 집안은 날로 번창해 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햇빛
이 다다른 곳에 명당이 있었다 하여 여기를 광달이라 부르게 되
었다.

▶채광리 개와막 요지(窯址 : 가마터)

채광리 개와막에 조선시대의 다마터인 요지가 있다. 이 요지는
개와막의 북동쪽에 위치한 바랑산의 남서쪽 산기슭 말단에 있다.

요지의 형태는 파괴되어 확인하기 어렵지만 기와편과 연기에 그
슬른 흙을 보고 요지임을 확인할 뿐이다.

▶채광리 바랑산 고분(古墳)

양촌면 채광리 바랑산에 시대는 알 수 없지만 고분 10여기가 발
견되고 있다. 이 고분은 산에 있는 들로 축조되었고, 이미 도굴
파괴되어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청자가 출토되었다 하고 구조로 보아 고
려시대의 석축묘라 추정하고 있다.

*참고-論山地域의 地名由來(1994년12월25일,논산문화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