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봉동리(鳳洞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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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논산문화원 | 등록일 | 2002-05-21 | 조회 | 10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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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여산군(礪山郡) 공촌면(公村面)의 지역으로 옛날 이마
을에 공촌부곡(公村部曲)이 있어서 공골 또는 공촌이라 하였는 데 변하여 뷩골 또는 봉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봉리(上鳳里), 하봉리(下鳳里), 칠전리(漆田里), 두화리 (杜花里), 장항리(獐項里)의 각 일부와 북삼면(北三面)의 교항리 (橋項里), 포변리(逋邊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봉동리라 하고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황화면(皇華面)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1월1일 연무읍이 승격됨에 따라서 논산군 연무읍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봉동1, 2, 3, 4, 5, 6리(봉동6리는 1992년에 봉동1 리에서 분구)로 되어 있으며 인구는 433세대에 1,471명의 주민 이 거주하고 있다.(1993.12.31 현재) 자연부락은 공촌, 남두, 내 송, 독상자리, 두아리, 봉동, 북두, 상봉, 서당골, 서칠, 소로 지, 안소로지, 옻나무골, 작은소로지, 원칠, 하봉등이 있다. ▶자연부락 및 지명유래 각시둠벙[물] : 북두 앞에 있는 둠벙으로 각시붕어가 많이 살았 다고 한다. 갑바지[논] : 남북두 서쪽에 있는 논인데 옛날 이 논에서 큰 가 물치를 잡아 네 성이 무었이냐고 물으니 갑가갑가하였다고 하는 데 변하여 갑바지라 부른다고 한다. 갓바지[들] : 두화리 북쪽에 있는 들인데 지형이 낮아서 수침이 잘 된다. 공촌(公村)[마을] : 봉동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공촌부곡(公村部 曲)이 있었다하여 공촌 또는 공골이라고도 하였다. 송촌부곡(公村部曲)[마을] : 봉동리 또는 공촌이라고도 한다. 남두(南杜)[마을] : 두화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내송(內松)[마을] : 소로지 안쪽에 있는 마을로 큰 소로지라고 도 한다. 독상자리[마을] : 하봉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두아리[마을] : 두화리 라고도하며 하봉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 다. 두화리(杜花里)[마을] : 하봉 북쪽 들가운데에 있는 마을인데 지 형이 마치 똥아리처럼 되어 있다하여 또아리라 부르다가 두아리 또는 두화리라 부른다 한다. 두화보(杜花洑)[저수지] : 두화리 남쪽에 있는 저수지인데 마산 천 저수지 라고도 한다. 마산천의 물을 막아 약 80정도 되는 논 에다가 저수하였다가 그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다. 마산천저수지[저수지] : 두화보라고도하며 두화리 남서쪽에 있 는 저수지이다. 맥피리[논] : 하봉 북쪽에 있었던 마을인데 지금은 논이 되었다. 봉동리(鳳洞里)[마을] : 봉동이라고도 한다. 북두(北杜)[마을] : 두화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사정터[터] : 안소로지 동쪽 언덕위에 있는 활을 쏘던 사정(射 亭)의 터이다. 상봉(上鳳)[마을] : 봉동 위쪽에 있는 마을로 상봉리라고도 한 다. 상봉리(上鳳里)[마을] : 상봉이라고도 하며 봉동 위쪽에 있는 마 을이다. 새털펀디기[못] : 북두마을 뒤쪽에 있던 큰 둠벙인데 물이 좋아 사방의 논에 물을 대었다고 한다. 서당골(書堂)[마을] : 하봉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묵암(墨岩) 이 계맹(李繼孟)이 이곳에 서당을 짓고 후진들을 가르쳤던 서당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서당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서칠(西七)[마을] : 칠동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섬터[터] : 남두마을 남쪽에 있는 곳으로 후백제군사들이 신발 을 갈아신고 가던 곳이라고 한다. 소로지[마을] : 봉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송화리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에는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소나무 밑으로 작은길이 나 있어서 소로지라 불렀다고 한다. 소로지 바깥에 있는 마을을 외송이라 부르고 안쪽에 있는 마을을 내송이라 부른다. 송화리(松花里)[마을] : 소로지라고도 하는데 봉동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안소로지[마을] : 큰 소로지라고도 하며 소로지 안쪽에 있는 마 을이다. 오룡골[골] : 상봉 위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오룡보[보] : 오룡골에 있는 보이다. 옻나무골[마을] : 칠동이라고도 하며 봉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옻나무가 많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옻나무골이라 부른다 한다. 외송(外松)[마을] : 작은 소로지라고도 하는데 소로지 바깥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용육고비[못] : 두화부락 왼쪽에 있던 깊은 둠벙인데 옛날 용이 올라 갔다고 한다. 원칠(元七)[마을] : 칠동의 원래의 마을 작은소로지[마을] : 외송이라고도 하는데 소로지 바깥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라 하여 작은 소로지라 하였으나 지금은 큰 소로지 보다 마을이 더 크다. 진허리수문[수문] : 1930년경 두화와 칠동 중간에 수문을 놓았는 데 흙을 파니 그 땅속에서 핏물이 나왔다고 한다. 지관들에 의하 면 지네 허리형의 중간지점을 끊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 끊은 곳 을 지네 허리 수문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진허리 수문이라 부 른다고 한다. 칠동(漆洞)[마을] : 봉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옻나무가 많았으므 로 옻나무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칠동이라 부른다 한다. 큰소로지[마을] : 소로지 안쪽에 있는 큰 마을로 내송 또는 안소 로지라고도 한다. 지금은 작은 소로지 보다도 더 작은 마을이다. 하봉(下鳳)[마을] : 봉동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하봉리라고도 한 다. 하봉리(下鳳里)[마을] : 하봉이라고도 하며 봉동 아래에 있는 마 을이다. ▶지네 허리형인 진허리수문 연무읍 봉동리에 진허리 수문이란 곳이 있다. 1930년경 두화와 칠동 중간에 있는 산성을 잘라 수문을 설치하기 위하여 파기 시 작했다. 그런데 그 땅속에서는 새빨간 핏물이 나로고 있었다. 땅 을 파던 인부들은 모두가 놀라 밖으로 나왔다. 그후 두화부락 청년 10명이 갑자기 목이 아프다고 하더니 죽고 말았다. 마을에서는 이름있는 지관을 불러다가 물어 보았다. 지 관은 지형을 살피더니 「이곳은 지네허리형인데 중간지점을 끊어서 산신령이 노하여 그 렇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제물을 준비하여 산신령을 위해 제사를 지내니 그 이후에는 그런일이 업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끊은 곳을 「지내허리수문」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진허리수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論山地域의 地名由來(1994년12월25일,논산문화원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