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소룡리(小龍里) 게시판 상세보기

[논산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소룡리(小龍里)
작성자 논산문화원 등록일 2002-05-21 조회 1339
첨부  
 
은진군 구자곡면의 지역으로서 이무기가 집을 짓고 반용이 되어
서 천운을 기다렸다가 승천한다는 용굴이 있다하여 소룡골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지리(陽地里)일부를 병
합하여 소룡리라 하고 논산군 구자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1
월1일 연무읍이 승격됨에 따라 논산군 연무읍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소룡1리로 되어 있으며 인구는 157세대에 548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1993.12.31 현재) 자연부락은 기촌, 대
촌, 와촌, 지내기, 차돌배기 등이 있다.

▶자연부락 및 지명유래

강경수원지(江景水源地)[저수지] : 지내기에 있는 저수지로 지내
기 수원지라고도 부른다. 강경읍의 상수도의 수원지이다.
기촌(箕村)[마을] : 와촌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땅
속에 물이 없는지 우물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기촌
이란 원래 성격이 강직한 사람만 모여사는 곳이라 하여 널리 알
려져 있다.
대촌(大村)[마을] : 와촌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소룡골에서는 가
장 큰 마을이라 하여 대촌이라 부른다고 한다.
등토산[산] : 소룡리와 양지리를 가로지르고 있는 산으로 명당자
리로 유명하지만 그 등토산의 등성이는 역적날이라고 한다.
백석[마을] : 대촌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차돌배기라고도 한다.
비나봉[산] : 대촌 남쪽에 있는 산인데 높이가 50m이며 봉우리
가 마치 비녀같이 생겼다 하여 비나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소룡골(巢龍)[마을] : 소룡동 또는 소룡리라고도 하는데 옛날 용
굴이 있었다 하여 소룡골이라 부른다 한다.
소룡고개[고개] : 함박재 북서쪽에 있는 높은 고개로 소룡골재라
고도 한다. 이 고개를 넘으면 전북 완주로 가는데 옛날 용물보
아래에 이무기가 승천할 때 이 골짜기에는 푸른 빛깔의 물줄기
가 하늘로 치솟아 이고개에서 용굴로 먹구름이 덮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용굴에 있던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용이 사는 고개라 하여 소룡고개 또는 소룡골재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소룡골재[고개] : 소룡고개라고도 하며 함박재 북서쪽에 있는 고
개이다.
옥녀봉(玉女峯)[산] : 함박봉 동쪽에 있는 산을 옥녀봉이라 부른
다. 산봉우리가 마치 옥녀처럼 단정하다하며 옛날 선녀들이 여기
에 내려와 놀다가곤 했다고 한다.
옻나무골[골] : 기촌 뒤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와촌(瓦村)[마을] : 소룡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강씨
한사람이 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하여 와촌이라 부른다한다.
용굴(龍窟)[굴] : 용물보 위에 있는 굴로 바위속에 굴이 있다.
이 굴은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할 때 사는 굴이라 하여 용굴이
라 부른다 한다.
용물보[보] : 지내기 아래에 있는 보로 용수보라고도 한다. 이
보에는 용굴이 있고 저수지 보뚝이 바위로 되어있다.
용수보[보] : 용물보라고도 하며 지내기 아래에 있는 저수지보이
다.
지내기[마을] : 와촌 동남쪽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강경수원지
가 있다.
지내기수원지[못] : 강경 수원지라고도 하는데 지내기에 있는 저
수지로 강경읍의 상수도 수원지이다.
지내기재[고원] : 지내기에 있는 고개로 지악현이라고도 한다.
진악리(鎭岳里)[마을] : 지내기라고도 하는데 와촌 동남쪽 산골
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진악현(鎭岳峴)[고개] : 지내기에 있는 고개로 지내기재라고도
한다.
차돌배기[마을] : 대촌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백석이라고도 부른
다. 옛날에는 산에 차들이 많아서 장관을 이루어 낮에는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차들이 박혀
있는 산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차돌배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함박봉[산] : 비녀봉 남동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401m이다.
함박재[고개] : 함박현이라고도 하는데 함박봉 동쪽에 있는 높
은 고개이다.
함박현(咸朴峴)[고개] : 함박재라고도 하며 함박동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명당자리 등토산

연무읍 등토산 명당 자리에 선조의 묘를 잘써서 조선팔도에 여
덟사람의 감사 벼슬을 한 명문이 나왔다고 한다. 어느날이었다.
꿈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서
「그대의 선대 묘소를 잘써서 자손이 융성하고 있으나 여덟감사
로 끝이날 것이다.」
하고는 사라졌다. 깜짝 놀라 잠이깬 그는 손가락을 꼽아보니 감
사가 여덟명이나 되었다. 그는 삽을 들고 등토산에 올라가 조상
의 묘를 파가지고 등토산 중간쯤에 다시 묻었다. 그는 집에 돌아
와 잠시 눈을 감았는데 그 노인이 꿈속에 또 나타나서
「잘한 일이다. 그 명당자리는 여덟검사가 나오면 꼭 연적이 하
나씩 나오는 그런 자리일세」
하고는 또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도 등토산은 명당자리로 유명하
지만 등토산 등성이는 역적이 난다고 하여 역적날이라고 부른다
고 한다.

*참고-論山地域의 地名由來(1994년12월25일,논산문화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