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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악리(花岳里) 게시판 상세보기

[논산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화악리(花岳里)
작성자 논산문화원 등록일 2002-06-04 조회 1107
첨부  
 
뒷산이 꽃으로 두른 언덕이라 하여 화악(花岳)이라 부르게 되었
다 하며, 뒷산 이름도 화악산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연산군, 식
한면(食汗面)의 지역이었는데 화악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
여 화악골 또는 화악이라 불러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
라 수락리(水落里), 천동(泉洞), 이곡(梨谷)의 일부를 병합하여
화악리라 하고 논산군 연산면에 편입하엿다. 화악리는 천연기념
물로 지정되어 있는 오골계의 사육지로 옛날에는 역대 임금께 진
상하였다.

행정구역은 화악1리로 되어 있으며, 인구는 108세대에 419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1993.12.31 현재) 자연부락은 무주터, 봉
룡정, 샘골, 화악골 등이 있다.

▶ 자연부락 및 지명유래

너더릿들[들] : 화악골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덕바위고개[고개] : 샘골에서 덕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도적이
많아 사람들이 모여서 넘어갔다고 한다.
무주티[마을] : 화악골 북쪽에 잇는 마을로 물이 늘 흘러서 무주
티 또는 걱정없이 산다하여 무주리라 하며, 물이 항시 떨어진다
하여 수락, 수락리라고도 부른다.
배울고개[고개] : 무주티에서 두마면 도곡리 배울로 넘어가는 고
개이다.
봉룡정(鳳龍亭)[마을] : 봉무정(鳳舞亭)이라고도 하는데 화악골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 처음 자리잡은 이봉무란 사
람이 정자를 짓고 이씨 집안의 자제만 글을 가르쳤는데 이곳에
서 글을 읽기만 하면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하며 이곳은 봉황이
춤을 추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봉무정(鳳舞亭)[마을] : 봉룡정이라고도 하는데 화악골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샘골[마을] : 무주티 남서쪽 즉 화악산 북쪽 깊은 골짜기에 있
는 마을로 물이 많고 찬물이 나온다 하여 샘골 또는 천등이라고
도 부른다.
생골[마을] : 샘골 또는 천동이라고도 하며 화악산 북쪽 골짜기
에 있는 마을이다.
수락(水落)[마을] : 화악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무주티 라고도
하는데 이마을은 물이 흘러서 가뭄에도 걔속 물이 떨어진다 하
여 수락 또는 수락리라고도 한다.
수락리(水落里)[마을] : 무주티 또는 수락리라고도 하며 화악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참샘골[골] : 화악골 소쪽 골짜기로 찬물이 나오는 샘이 있다하
여 참샘골 또는 참샛골 이라고도 한다.
참샛골[골] : 참샘골 이라고도 하며 화악골 서쪽 골짜기를 말한
다.
천동(泉洞)[마을] : 화악산 북쪽 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찬
물이 많이 나온다 하여 샘골 또는 생골이라고도 부른다.
치마바위[바위] : 화악리에 있는 바위로 마치 모양이 치마처럼
생겼다 한다.
화산공탑[탑] : 옛날 전주이씨중의 한 사람이 머리는 좋으나 출
세하지를 못하자 바위모양이 치마처럼 생긴 치마바위를 깨뜨리
자 피가 흘러 폐촌이 되었다. 그후 화산공이 폐촌을 재건하기 위
해 탑을 세웠는데 이 탑을 화산공이라 부른다.
화악(花岳)[마을] : 화악리라고도 하는데 뒷산에 꽃으로 두른 언
덕이 있다하여 화악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화악골[마을] : 화악 또는 화악리라고도 하는데 마을이 마치 꽃
으로 두른 것같이 생겼다 한다.
화악산(花岳山)[산] : 화악골 뒤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305m인
데 산모양이 마치 꽃처럼 되었다고 한다.

▶치마바위와 화산공탑

연산면 화악리에 치마바위와 화산공탑이 있다. 옛날 전주 이씨
인 이봉무란 사람이 이곳에 와서 산세가 아름다워 이곳에 정착하
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마을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생각하면서
뒷산에 올라가 보았다. 언덕위에는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무릎을 치며
「옳거니! 꽃으로 두른 언덕이라....... 그렇지 화악이라고 하
자.」
이렇게 하여 마을이름을 화악이라 하였고, 마을 뒷산을 화악산이
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서족들은 머리가 좋아도 출세할 수가 없었다.이 마을
에 서족 출신의 한 사람이 이를 개탄하여 살아오다가 홧김에 마
을에 있는 치마바위를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깨어진 치마
바위 속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온 마을이 피바다가 되
어 버렸다. 마을은 폐촌이 되어 갔다.
세월이 지난 후 전주이씨 화산공이 화약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탑을 세웠는데 이 탑을 화산 공탑이라 부르며 이탑을 세운후부
터 집안이 번성하였다고 전한다.

*참고-論山地域의 地名由來(1994년12월25일,논산문화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