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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리(禹基里) 게시판 상세보기

[논산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우기리(禹基里)
작성자 논산문화원 등록일 2002-06-04 조회 1629
첨부  
 
옛날부터 이곳은 신선객의 요람지로 이상적인 잘사는 나라가 되
었을 때 도읍지로 임금터가 될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어 마을 이
름도 임금터 또는 우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은진군 도곡면(道谷面)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이화리(梨花里), 토양리(土良里)의 각 일부와 대조곡면
(大鳥谷面)의 방축리(防築里)일부를 병합하여 우기리라 하고 논
산군 채운면에 병합하였다.

행정구역은 우기1, 2, 3리로 되어 있으며, 인구는 243세대에
804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1993.12.31 현재) 자연부락은 가
운데 임금터, 도양골, 배꽃, 용골, 작은 임금터, 큰 임금터 등
이 있다.

▶ 자연부락 및 지명유래

가운데임금터[마을] : 임금터 가운데에 있는 마을로 중우기라고
도 한다.
가잣골[마을] : 심암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마치 가지와 같
다하여 가지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가잣골이라 부른다고 한
다.
가지골[마을] : 가잣골 이라고도 하며 심암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가지와 같이 생겼다고 한다.
가지동(柯枝洞)[마을] : 심암 북쪽에 있는 마을로 가지골 또는
가잣골 이라고도 한다.
갯논[마을] : 배꽃미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갯펄을 메꾸어
전답을 만들었고 그후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닭머리재[산] : 우기리와 심암리 경계에 있는 야산으로 지형이
마치 암탉이 알을 품고 있고 닭의 머리와 같다하여 닭머리재라
부른다고 한다.
대우기(大禹基)[마을] : 배꽃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큰 우기 또
는 큰 임금터라고도 한다.
도양골[마을] : 용동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도양동 이라고도 한
다. 옛날 서당인 도양서숙(道陽書塾)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
다.
도양동(道陽洞)[마을] :도양골이라고도 하며 용동 남동쪽에 있
는 마을이다.
배꽃[마을] : 우기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이화라고도 한다. 이화
낙지형(梨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소우기(小禹基)[마을] : 작은 우기 또는 작은 임금터라고도 하
며 중우기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용골[마을] : 작은 우기 옆에 있는 마을로 뒷산에 용굴이 있다
고 한다.
용굴[굴] : 용골 뒷산에 있던 굴인데 이 굴에서 용이 승천했다
고 하며 지금은 없어졌다.
용동(龍洞)[마을] : 용골이라고도 하며 작은 우기 옆에 있는 마
을이다.
우기(禹基)[마을] : 잘사는 나라가 되었을 때 도읍지라고 하여
임금터 또는 우기, 우기리하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원항섬[마을] : 임금님의 후비 한 사람이 이곳에서 귀양살이 하
면서 망향의 그리움을 달래며 생을 마친 곳이라 하여 원항섬이
라 부른다고 한다.
이화(梨花)[마을] : 배꽃이라고도 하며 우기리에서 가장 큰 마을
이다.
임금터[마을] : 옛말에 이곳은 신선객의 요람지로 이상적인 나라
가 서게되면 도읍이 자리잡을 임금터가 될 것이라고 전하여 임금
터 또는 우기, 우기리 라고 하였다.
작은우기[마을] : 작은 임금터라고도 하며 중우기 남동쪽에 있
는 마을로 임금터에서 맨 나중에 이룩한 마을이다.
작은임금터[마을] : 작은 우기라고도 하며 중우기 남동쪽에 있
는 마을이다.
중우기(中禹基)[마을] : 가운데 임금터라고도 하며 큰 우기 동쪽
에 있는 마을로 임금터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큰우기[마을] : 큰 임금터라고도 하며 배꽃 북동쪽에 있는 마을
로 임금터 중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다.
큰임금터[마을] : 큰 우기라고도 하며 배꽃 북동쪽에 있는 마을
이다.

▶ 한여인이 망향의 그리움을 달래며 생을 마친 원항섬

옛날 한 처녀가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궁중으로 들어가 임금님
의 총애를 받으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어느날 그녀는 임금님을
따라 사냥을 가게 되었다. 그녀는 임금님의 반대 방향에서 말을
타고 짐승만 발견하면 백발 백중으로 짐승을 잡는 것이었다.
그녀가 화살을 쏘았는데 임금님 머리 위로 날아 나무에 꽂혔
다. 두 번째 화살이 또 날아가 임금님의 화살통을 땅에 떨어 뜨
렸다. 임금님은 화가 나서 그녀를 지금의 채운면 우기리로 귀향
을 보냈다.
그녀는 강가에서 고기를 잡아 먹으면서 이곳 백성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래도 편안하게 살다가 임금님을 생각하며 죽어 갔
다. 그녀가 살았다고 하는 곳을 후세 사람들은 한 여인의 망향
의 그리움을 달래며 생을 마친 곳이라 하여 원항섬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임금터 우기리

채운면 우기리는 이상적인 나라가 되었을 때 도읍이 자리잡을
임금터가 될 것이라는 말에 따라「임금터」또는「우기」라 부르
게 되었다고 전한다.
백제때 의자왕은 궁녀들과 함께 유흥을 즐기며 이곳까지 와서
용꽃, 배꽃, 매꽃, 들꽃, 산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절경을 보고
심취해 있었다. 그리고는 이곳에다가 왕도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
느냐고 신하들에게 물으니
「이곳은 강물이 염기가 많아 적당하지 못하옵니다.」
라고 하는것이었다. 그래도 의자왕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저
주저 하다가 백제가 망하자 그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 그래서 다
시 임금터가 되려면 오랜 세월이 지나야 된다고 하며 임금터에
서 맨 나중에 이룩된 작은 임금터는 임금님을 지키는 요람지가
되고 가운데 임금터는 가장 번화한 거리가 될 것이라고 전해온
다.

▶ 알을 품고 있는 형인 닭머리재

채운면 우기리와 심암리 경계는 지형이 마치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형태와 같다하여「닭머리재」라 부른다.
일제시대의 일이다. 왜놈들이 이곳에 신작로를 낸다 하자 마을
노인들이
「이 날을 건드리면 혈이 끊어져 우리 마을은 망하게 됩니다.」
하면서 말렸지만 왜놈들은 들은체도 하지 않고 땅을 파헤치기 시
작했다. 이때였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천둥번
개가 내려치고 땅을 파던 곳에서는 검붉은 피가 나오기 시작하였
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릉 품고 있는 암탉의 혈을 끊어 산세가 없어
져 명당이 끊겼다 하며 지금도 아쉬워 한다고 한다.

*참고-論山地域의 地名由來(1994년12월25일,논산문화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