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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모장군(禦侮將軍) 김후진(金厚振)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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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모장군(禦侮將軍) 김후진(金厚振)
작성자 태안문화원 등록일 2016-05-24 조회 686
첨부  
 

어모장군(禦侮將軍)김후진(金厚振)의 호는 송제공(松齊公)이요.

조선 선조(宣祖)때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관직은 충무위부
사과(忠武衛副司果) 를 역임하시고 또한

국조개국(國祖開國)양무 (揚武)22공신의 한 분이다.


공(公)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제22세손이요 관조(貫祖) 김녕군
(金寧君)김시흥(金始興)의 제14세손이다. 그리고 조선조 세조(世
祖)때 단종복위(端宗復位)의 핵심 주역으로 순직한 당시 공조판
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제6세손이다.


공은 선조8년(1575)에 충청북도 영동(永同)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9세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육도삼략(六韜三略)·손오병법
(孫吳兵法)을 두루 독파하여 이곳 사람들은 신동이 출현했다고
칭송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다.

그 후 1590년 이곳 태안군 근흥 면 도황리(연포)에 이주하시어

후학들을 훈도하시며 우거(寓居) 하셨다.


마침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나라를 건지겠다는 구국일념으

우선 태안지방에서 모집한 의병100 여명을 인솔하고 호남지방
으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의병 5천 여명을 모집하고 창의사(倡義
使)가 되어 이 의병들을 그 당시 남해지역을 방위하는 충무공 이
순신장군의 진중에 편입시켜 해전에 임했다.


특히 공은 전술과 지략이 뛰어나 왜적 수군의 진로와 퇴로를 차
단하여 그 기세를 꺽어 완전히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나 애석하게도 선조31년(1598) 11월 노량(露梁)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 뒤 고종(高宗)10년 (1873) 3월 고종황제께서 공의 애국정신

전공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충훈부(忠勳府)에 그 사실을 등
재하고 인각(麟閣)에 보존케 하여 그의 후손들에게 관대히 예우 하라고

계하사목(啓下事目)이라는 장계(狀啓)를 내리시어 전국에 반포하셨다.

 
어모장군 김후진은 경상남도 지금의 남해대교 부근(露梁)에서
순국하였는데 임진왜란속에 전사했기 때문에 시신도 거두지 못해

어모장군(김후진)의 부인(妻)이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대교 부근까지

직접 내려가셔서 흙 한줌과 투구를 수습하여 가지고 오셔

자기가 우거하였던 뒷동산(연포해수욕장 동편)에 장사 지냈

하는데 이 묘지를 투구무덤(兜墳-두분)이라 한다. 


그리고 충청감사 태안군수 안흥첨사가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말위에서 내려 어모장군 무덤을 향해 절을 하고 무덤이 안 보일 때 까지

걸어 갔다 하여 이지점을 하마처(下馬處)라고 전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