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간재(艮齋) 전우(田愚)선생 게시판 상세보기

[태안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간재(艮齋) 전우(田愚)선생
작성자 태안문화원 등록일 2016-05-24 조회 3105
첨부 jpg 간재(艮齋) 전우(田愚)선생.jpg

 

1) 간재(艮齋) 전우(田愚)

(1) 생애와 업적 간재 전우의 생애는 (金忠浩 譯, 『國譯 艮齋先生 行狀』, 民族文化推進會, 2000)을 참조하였다.

전우(田愚, 1841~1922)의 초휘(初諱)는 경륜(慶倫) 또는 경길(慶佶), 자(字)는 자명(子明), 호(號)는 간재(艮齋)·구산(臼山)·추담(秋潭), 본관(本貫)은 담양(潭陽)이다. [사진 1] 간재 전우 ‘간재’는 스승인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任憲晦 (1811∼1876)의 본관은 豊川, 자는 明老, 호는 鼓山·全齋·希陽齋이다. 아버지는 天模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로 益和의 따님이다. 宋穉圭와 洪直弼 등에게서 배웠고, 1858년(철종 9) 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이듬해 다시 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 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 장령·집의·掌樂正이 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때 萬東廟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재삼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4년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뒤 대사헌·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洛論의 대가로서 李珥·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인 田愚에게 전수하였다. 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연기의 崇德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전재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文敬이다.
가 지어준 것이고, ‘구산’은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곳의 지명이다. 전우는 1841년(헌종 7) 8월 31일 전주부(全州府) 서문(西門) 밖 청석동(靑石洞) 청석교(靑石橋) 앞의 집에서 청천(聽天) 전재성(田在聖)과 남원 양(梁)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전재성이 충청도 洪州에서 살다가 全州로 移居한 뒤 전우를 낳았다고 하며, 큰아들 慶俊은 큰아버지인 僉正公 田宜聖의 後嗣로 出系하였다.
6세(1846년)에 『소학(小學)』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전우 집안의 가세는 넉넉했던 것으로 보이며, 부친 전재성 슬하에서 일찍부터 유교의 가풍에 따라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9세(1849년) 때에 집 마루에 놓인 화분에 피어있는 매화꽃을 보고 전재성은 문득 자식의 글재주를 시험하여 볼 마음으로 향(香)자 운을 주어 시를 지어보라고 하니,

聽雪鼓絃琴韻冷 눈소리 들으며 거문고 뜯으니 운율이 싸늘하고
看花題句墨痕香 매화를 보며 시를 적으니 먹에서 향기가 나도다.

라고 즉석에서 지으니, 부친이 더욱 총애하고 수학에만 매진토록 하였다.
12세(1852년) 때부터 왕희지(王羲之)의 필법(筆法)을 익혔다고 하며, 14세(1854년)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 정동(貞洞), 삼청동(三淸洞), 순화동(順化洞) 등에서 살았다. 이 때 명필(名筆)로 알려진 조송운(趙松雲)이 붓글씨로 쓴 적벽부(赤壁賦)를 모사하였는데, 진위(眞僞)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듯 한 때 글씨 쓰기에 열중하였으나, ‘말기(末技)에 머물 것이 못된다’ 하여 그만 두었다고 한다. 18세(1858년) 때에 밀양 박씨와 결혼하였으나, 불과 1년 만에 책을 싸들고 입산하였으며, 심오한 고전에 탐닉하면서 시문에 일가를 이루면서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0세(1860년)에 퇴계(退溪)의 글을 읽고 학문이 있음을 알고 매우 기뻐하였다고 하는데, “내가 20세에 비로소 『퇴계집』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서 뜻이 간절하던 차에, 퇴계 선생의 현몽으로 학문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고 훗날 술회하였다 한다. 당시 충청도 아산(牙山)의 신양(新陽)에는 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廷淳) 등의 제자를 가르치던 임헌회의 명성이 드높았다. 이에 그는 21세(1861년) 때 신응조(申應朝) 申應朝(1804∼1899)의 본관은 平山, 자는 幼安, 호는 桂田·苟菴이다. 同知敦寧府事 常顯의 아들이며, 洪直弼의 문인이다. 1852년(철종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조정랑·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1866년(고종 3)에 이조참판·대사헌, 1871년에 강원도관찰사, 1873년 형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1882년 7월 判府事로 있으면서 倭洋一體의 처지에서 邪學과 洋術을 배격하였는데, 특히 인천개항은 삼남과 서북의 이권을 침탈 당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지리상의 요지이기 때문에 최대의 우려가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수교 및 통상을 제한하려는 斥邪의 견해를 주장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재집권하게 된 대원군에 의하여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出仕하지 않았다. 뒤에 좌의정에 올랐으며, 연로하여 퇴임한 뒤에는 耆老所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계전집』이 있다. 시호는 文敬이다.
의 소개를 받아 임헌회를 만났다. 이때부터 임헌회의 가르침 아래 그의 학풍을 계승하기 시작하였고, 23세(1863년)에는 우의정 박규수(朴珪壽)가 보양관(輔養官)으로 천거하였으나 왕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고, 25세(1865년)에는 부친이 임헌회를 따라 공주(公州)의 명강(明剛)으로 이사하여 스승을 매일같이 모셨다. 30세(1870년) 때에는 스승 임헌회가 왕을 알현하고 전우를 인재로 추천하였다. 36세(1876년)에 임헌회가 공주 성전(星田)으로 이사하자 그곳과 가까운 연기(燕岐) 죽안(竹岸)으로 이사하였다. 임헌회의 사후(死後)인 38세(1878년)에 충북 음성(陰城) 삼현(三峴)으로 이사하였고, 42세(1882년)에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이 천거하여 8월에 선공감 가감역(繕工監 假監役)과 감역(監役)에, 9월에는 전설사 별제(典設司 別提)와 강원도 도사(江原道 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상주(尙州)․장암(壯岩)․문경(聞慶)․진천(鎭川)․만죽(晩竹)․문천(文泉)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길렀다.
54세(1894년)에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5세(1895년)에 박영효(朴泳孝)가 수구학자(守舊學者)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간재를 죽여야 한다고 고종에게 주청하였으나, 고종은 오히려 그를 순흥 부사(順興 府使)·중추원 찬의(中樞院 贊議)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 해인 1896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弑害)당하자 전우는 상소문을 올려 역적을 처벌할 것을 역설하였다. 또한 단발령(斷髮令)의 공문을 보고 통곡하며 모든 자손들과 문인들에게 죽음으로 유학의 전통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 같은 해 7월 최명희의 주선으로 충청도 태안의 근흥면에 와서 2년 7개월간 후진 교육에 몰두하여 서산과 태안 지역의 유풍(儒風)을 크게 진작(振作)시켰으며, 59세(1899년)에 공주 금곡(金谷)으로 이사하였다.
65세(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세 차례에 걸쳐 ‘청참오적(請斬五賊)’이란 제목의 상소문을 올려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 ‘경세문(警世文)’ 등을 지어 이토오 히로부미를 탄핵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상소를 올렸으나 중간에서 방해를 받아 전달도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매국노들의 사주를 받은 대신들이 그를 죽이라고 고종에게 주청하였으나, 임금은 ‘너희들은 짐에게 선비를 죽인 누를 입게 하려 하느냐’고 하였다 한다. 68세(1908년)에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라고 하였으니 나도 바다로 가겠다!」라고 하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위도 서쪽에 있는 왕등도(旺嶝島)로 들어갔다. 왕등도는 본래 왕이 한 번 오를 만한 경치가 좋은 섬이라 하여 왕(王)등도였는데, 간재가 이곳에 온 후 이를 불경스럽다 하여 왕(旺)등도로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艮齋先生文集』의 「年譜」에 의하면, 태안에 머물 당시에도 이미 浮海之意를 품어 安民島로 옮기려 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거론하게 될 것이다.
이듬해 제자들의 간청으로 군산도(群山島) 구미촌으로 거처를 옮겨서 학문을 폈다. 70세(1910년)에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은 간재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을 통곡하다가 다시 왕등도로 들어갔다. 이듬해 11월 일본인 경무부 고등관이 경비선을 타고 왕등도에 들어와 그의 동태를 살폈다. 이 때 간재는 벽에 ‘萬劫終歸韓國士 平生趨付孔門人(만겁이 흘러도 끝까지 한국의 선비요, 평생을 기울여 공자의 문인이 되리라)’라는 시 이 시구는 현재에도 계화도의 계양사에 전하고 있다.
를 게시하여 놓고 있었다. 이를 본 일경도 진짜 한국의 선비를 만났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한다. 72세(1912년)에 전우는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왕등도에서 나와 군산도에서 머물다 부안의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고, 계화도(繼華島 ;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제자들이 수집한 간재문집 전고(前稿)를 완성하였다. 이후 74세(1914년)에는 그의 입해(入海) 이후의 감상을 적은 ‘해상산필(海上散筆)’을 완성하였다. 78세(1918년)의 고령에 이른 전우는 손자를 앞에 불러 놓고, “나는 한국의 유민으로서 어찌 타국에 입적(入籍)하겠는가. 너도 죽을지언정 도장을 찍어 입적을 허락해서는 안된다(吾以韓國遺民 豈肯入籍於他邦 汝雖死不可奈章)” 라는 글을 써주면서 왜적(倭籍)으로 입적을 하지 말도록 하였다. 79세(1919년)에 고종의 석연치 않은 붕어(崩御) 소식을 접하고, 삼년 상복을 입기 시작했다. 또한 1920년 5월에 동아일보 사장 박영효가 주자학의 의리를 비판한 데 대하여, 이를 성토하는 등 고령에 이르러서도 그의 기개는 꺾일 줄을 몰랐다. 82세(1922년)에 제자들이 수집한 원고를 친히 교정하여 간재문집 후고를 완성한 전우는 이해 7월 4일 82년의 생애를 마쳤다. 9월 13일 전북 익산의 선영에 묻히었는데 그의 영구를 따른 사람이 2천여 명이었으며, 장례를 보러 몰려든 사람은 6만여 인파가 넘었다 한다.
학자의 참모습을 보여주며 현실의 동요 속에서 일생을 은거로 지낸 그의 문하에는 수많은 문인(門人)들이 배출되었다. 그의 학풍은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 창수(蒼樹) 정형규(鄭衡圭),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양재(陽齋) 권순명(權純命),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병암(炳庵) 김준영(金駿榮), 후창(後滄) 김택술(金澤述) 등 3,000여 명을 헤아리고 있다. 계화도의 계양사(繼陽祠)와 의령의 의산사(宜山祠), 지리산의 백운정사(白雲精舍), 고창의 용암사(龍巖祠), 정읍의 태산사(台山祠), 태안의 안양사(安陽祠) 등에 제향되었다. [사진 2] 안양사 저서로는 『간재집(艮齋集)』 30책, 『간재사고(艮齋私稿)』 30책, 『추담별집(秋潭別集)』 2책 등이 있다.
전우는 조선성리학의 마지막 시기를 장식한 대표적 학자였다. 율곡 이이와 우암 송시열을 이은 기호학파의 학맥을 계승하고 있으며, 간재학파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여 당대의 사상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국사상사연구회편, 『조선유학의 학파들』, 예문서원, 1996. p.620.
전주에서 출생하였지만,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수학기를 보내며 기호계열의 학자들과 인연을 가졌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율곡에 연원을 두게 되었고, 신응조의 소개를 통해 낙론계열의 맥을 잇고 있었던 전재 임헌회와 사제관계를 맺게 되면서 낙론의 계통을 이어받게 된다.

<낙론(洛論) 성리학(性理學)의 맥(脈) 崔完基, 『韓國性理學의 脈』, 느티나무, 1989. p.204 표 참조. 위의 <낙론 성리학의 맥>에 나타나는 간재 전우의 학통 연원도는 『화동연원록』의 「도통연원도」를 많이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尹榮善은 『朝鮮儒賢淵源圖』에서 이재-김원행-박윤원-홍직필-임헌회-전우으로 이어지는 學脈을 제시하였고, 尹泰順은 『東國儒賢淵源錄』윤근수-조익-이단상-김창협-김원행-홍직필-임헌회-전우로 이어진다 하였다.

전우의 학맥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손제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송시열의 제자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고 다름을 두고 호파(湖派)와 낙파(洛派)로 갈렸다. 낙파는 농암 김창협에 연원 낙학파의 연원을 왕조실록(『순조실록』10년 12월 25일 을사조)에는 외암 이간으로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에서는 낙학이 농암 김창협으로부터 근원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을 두고 있는데, 그 뒤를 이어 도암(陶庵) 이재와 미호(渼湖) 김원행에 이르러 크게 융성하였고, 이어서 근재(近齋) 박윤원, 매산(梅山) 홍직필, 고산(鼓山) 임헌회를 거쳐 간재 전우에 이르게 된다.
조선의 모든 유학자가 다 그러했듯이, 전우 역시 이(理)․기(氣) 논쟁에 참여했다. 그의 스승 임헌회의 이른바 성즉기(性卽氣)․기즉성(氣卽性)의 관점은 그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어, 당시의 주리론(主理論) 내지 유리론(唯理論)의 거유(巨儒) 기정진(奇正鎭)이나 이항로(李恒老)를 비판함으로써 기(氣)를 강조하는 입장에 섰다. 즉 이이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계승하여 이(理)는 무위(無爲)임을 주장하고 실제상의 작용은 모두 기(氣)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이의 명덕지시본심(明德只是本心)을 이어받아 심즉기(心卽氣)․명덕시기설(明德是氣說)을 주장했다. 또한 이이의 심위기주(心爲氣主)를 확대하여 심본성(心本性)․심학성(心學性)을 주장하고, 성존심비(性尊心卑)․성사심제(性師心弟) 등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냈다. 그는 특히 미발기질체청설(未發氣質體淸說)을 창안했는데, 이는 낙론계의 학설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전우의 학설은 율곡의 학설을 얼마만큼 철저하게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인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주자의 학설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주자가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작용을 설명하면서 성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위와 같은 전우의 학문적 성격은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고자 했던 점에서 조선 최후의 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다. 국난에 의병활동을 하지 않고 파리장서(巴里長書) 巴里長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儒林代表 郭鍾錫․金福漢 등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탄원서를 작성 서명하여 이를 김창숙이 상하이[上海]에서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 것이다. 그러나 日警에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부분의 유림대표가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 후 곽종석․김복한․河龍濟 등은 감옥에서 순사(殉死)하고 그 밖의 인사들도 일경의 고문에 못이겨 죽거나 처형되었다.
에 서명하지 않은 것 등 처신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지만,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전우는 『추담별집』을 통하여 “외세(外勢)에 나라가 혼란한 시기에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학문을 이루어 도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했고, 국권을 회복한다는 명목 아래 외세와 손을 잡으면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이적(夷狄)이 되는 것이다”라는 논지로 반박하였다.

(2) 태안 교육에 미친 영향
간재 전우는 임헌회와 사제의 관계를 맺은 후, 스승이 돌아가실 때까지 주로 충청도 지역을 옮겨 다녔다. 그리고 노백 최명희 崔命喜의 호는 老柏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哲宗 2년(1851)에 출생하였는데, 성품이 근엄 정직하고 博學篤行하여 명성이 세상에 널리 떨치었다. 노백의 영정은 그의 스승이었던 艮齋 선생과 함께 현재 안기리의 안양사에 안치되어 있다. 지금도 근흥면 안기리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태안군지』 제6절 문학예술인편 참조)
의 주선으로 태안으로 오게 되었다. 최명희는 임헌회의 사후 문인이며, 연령도 선생보다 불과 10년 연하일 뿐이다. 필사본으로 전하는 『艮齋先生門人錄』에는 선생이 제자를 받아들인 시기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노백 최명희는 1877년으로 매우 이른 시기에 사제의 관계를 맺었다. 같은 책에 의하면 간재가 문인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1871년이며, 그 이전의 제자는 김학증(金學曾)․안회식(安晦植)․임간재(任艮宰) 등 불과 3인에 불과하였다. 또한 서산의 향토사가 이은우의 조사에 의하면 을사보호조약 당시 최명희는, 승지(承旨)를 역임하고 향리로 물러나 홍주 갈산에 살던 안동 김씨 김복한(金福漢),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다 마찬가지로 향리로 물러나 서산 대산에 살던 경주 김씨 김약제(金若濟) 등과 더불어 국권 회복을 위한 모의를 하다가 홍주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은우, 「靑愚 金若濟 行錄」(『瑞山의 文化』 제8호, 서산향토연구회)

「연보」에 의하면, 전우가 태안으로 이거한 시기는 56세 때인 1896년(고종 33) 7월이며, 최명희의 주선으로 그의 일족 최용희(崔龍喜)의 독서소(讀書所)였던 연천서당(蓮泉書堂)에 머물렀다고 한다. 丙申 先生 五十六歲 七月 往泰安居蓮泉書堂 堂卽門人崔命喜族龍喜讀書所 而命喜之所奉迎也. 한편 『간재선생문집』 중 「화도연원록」에서 간재와 종유한 인근 인물로는 홍주의 金福漢과 서산의 金若濟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가 태안에 오기 바로 전해인 1895년에, 개화파 박영효가 전우는 수구학자의 우두머리로 개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고종에게 주청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같은 해 일본의 정략적인 계획 아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선생은 상소문을 올려 역적들을 처벌할 것을 역설하였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문인과 자손들에게 죽음으로 유학의 전통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간재는 斷髮을 행한 제자 1,000여 명을 門人錄에서 삭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간재의 제자를 2,000에서 3,000명까지 다르게 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우는 기울어져만 가는 나라에 대한 걱정과 개화파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 대한 극심한 절망감에, 공자가 말한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 라는 말을 상기하며 깊은 초야에 묻혀 후진을 양성하는 것만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던 듯하다. 이때 문인이었던 최명희가 태안으로 모시고자 하니 불현듯 자리를 떨치고 그리로 가지 않았나 한다. 실제로 간재는 태안으로 간 후 ‘최명희는 수창동(洙滄洞) 지금의 근흥면 水龍里를 말한다.
에 수사(洙社) 洙社는 洙滄의 社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洙社를 세우는 일이 섬으로 옮기려는 계획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문맥으로 보아 ‘수창동에서 일종의 결사체를 조직하였고, 선비들이 그 뜻을 쫓아서 모여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를 세우고, 사우(士友)들이 섬으로 옮기고자 하는 선생의 뜻을 받들어 모여들었고, 먼저 심능협(沈能浹)․전홍(全弘)을 보내어 안면도[安民島] 지금도 주민들은 安眠島를 ‘안민도’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보」의 安民島라는 표기는 그 발음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의 지형을 살피게 하였는데, 이에 앞서 수창동으로 옮긴 것인데 그 뜻은 실행되지 못하였고, 문인 심능협․전홍․맹면술(孟冕述)․이경우(李絅雨)가 집안을 거두어 따랐다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十月 移家于泰安洙滄 門人崔命喜殫誠立洙社 士友坌集 蓋先生有浮海之意 先遣沈能浹全弘于安民島相其地 而先移洙滄 以爲入島計 後不果 ○ 門人沈能浹全弘孟冕述李絅雨等撤家從之.
선생이 수창동으로 옮긴 시점은 1896년 10월이었다. [사진 3] 수창동 간재 선생의 훈학장소
이후 전우는 1898년 여름에 다시 문인 최명희와 함께 백화산 흥주사(興住寺)로 옮겨서 1899년 2월까지 후학을 양성하다가 공주 금곡(金谷)으로 옮겼다. 간재가 태안에 머무는 동안 명성황후의 소상․대상․담제가 있었는데, 대상과 담제 때에는 백화산에 올라 망곡(望哭)을 하기도 했다. 「연보」에 구체적인 장소는 나와 있지 않지만, 후일 興住寺로 옮긴 등의 사실로 미루어 望哭을 행한 장소는 흥주사 萬歲樓로 추정된다.
[사진 4_] 백화산 흥주사 만세루 전우가 태안에 머문 2년 7개월 동안의 활동이 자세하지는 않다. 또한 서산의 향토사가 이은우에 의하면, 1907년경부터 약 4년 동안 서산 대산의 수구물과 정자동에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고 하는데, 이은우는 1894년 현 대산읍 대산리 정자동(程子洞)에 김약제(金若濟)와 이규용(李圭容) 등이 건립한 대산강사(大山講舍) 등을 중심으로 후학을 양성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이은우이 글에 자세하다. 이은우, 「靑愚 金若濟 行錄」(『瑞山의 文化』 제8호, 서산향토연구회). 한편 이은우는, 艮齋先生門人錄에는 李圭容이 門人으로 登載되어 있으나 연령이나 郡守를 역임한 官歷으로 미루어 門人이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조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서산과 태안에서는 ‘5년 혹은 6년 동안 머물면서 40여 명의 문인을 키웠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그 사이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유풍(儒風)을 크게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사진 5] 간재 선생 문인록 서산과 태안의 간재학통은 하근재(下根齋) 김건주(金建周)에 의하여 이어졌다. 이은우의 글에는 金建周의 年譜와 門人錄 등이 실려 있어서 참고할 수 있다. 이은우, 「靑愚 金若濟 行錄」(『瑞山의 文化』 제8호, 서산향토연구회).
태안과 서산 일원의 선생의 제자는 본 연구를 진행하는 가운데 확보한 간재 선생의 문인록 3종을 통하여 대략을 확인할 수 있었다. 『艮齋先生門人錄』(대전 김영한 소장본), 『觀善錄』 (공주 이동원 소장 부본), 『華島淵源錄』(1962). 『간재선생문인록』은 筆寫本인데, 丙申年(1896) 중간 부분부터 字體가 달라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1896년 이후에 작성된 것이라 추정된다. 『관선록』은 1948년 간행된 『간재선생문집』의 부분이다.
그 가운데 문인록을 통하여 확인 가능한 태안과 서산 거주 문인은 46명인데, 그 현황은 아래의 <표 4: 태안․서산 지역의 간재 선생 문인 현황>과 같다. 『觀善錄』에는 瑞山과 泰安을 나누어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록된 面을 보면 瑞山과 泰安이 서로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원래의 기록을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그대로 全寫하고 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1962년 간행된 『화도연원록』에는 그 외에도 문인에 속하지는 않은 여러 유형의 제자들에 관한 기록도 들어 있다. 수업(受業)을 받되, 예(禮)를 갖추지 못한 경우에는 급문록(及門錄)에, 급문에는 미치지 못하나 가르침을 청하고 마음을 다한 경우는 존모록(尊慕錄)에, 그리고 문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사숙록(私淑錄)에 등재하고 있는 것이다. 태안과 서산의 경우, 존모록에 서산에 거주하는 김문환(金文煥, 丙戌 生)이 등재되어 있다. 사숙론에는 태안과 서산의 많은 제자들이 거론되고 있는데, 그 현황은 <표 5: 간재 선생 사숙론 등재 현황>과 같다.
<표 5: 간재 선생 사숙론 등재 현황>
艮齋 門人 姓名
제자 현황(출생년도/본관/거주지/특기사항)
비고
金建周
∙金昌圭(戊戌/慶州/서산/炳善族姪)
∙金復圭(壬寅/慶州/서산/炳善族姪)
∙都相一(壬寅/星州/서산)
∙金應圭(癸卯/慶州/서산/炳善族姪)
∙金鍾勳(丁未/金海/서산)
∙金建周 : 본관은 慶州, 호는 下根齋, 간재 문인 金明烈의 再從姪, 거주지는 대산면 운산리
∙그 외 제자 31인은 靈光 거주자 1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咸平 거주
吳震泳
∙李圭珍(辛巳/慶州/서산)
∙崔 欽(乙酉/慶州/서산/命喜의 子)
∙金炳老(丙戌/金海/서산/殉衣髮而復甦)
∙李忠求(己丑/全州/서산)
∙金 鋌(辛丑/慶州/서산/建周의 子)
∙南龜老(甲辰/英陽/서산)
∙沈宗澤(癸丑/靑松/서산)
∙崔商雨(丙辰/慶州/태안/欽의 從子)
∙崔兢雨(甲子/慶州/서산/欽의 子)
∙鞠 琮(乙丑/潭陽/서산)
∙賈在鶴( /蘇城/태안)
∙沈明澤(丙辰/靑松/서산/宗澤의 弟)
∙吳震泳 : 본관은 海州, 호는 石農, 鎭川 외가에서 출생, 陽城 剡溪에서 성장, 간재의 高弟로 간재 선생의 연보를 썼음
∙제자 중 崔欽, 金炳老, 李忠求, 金鋌은 艮齋에 이어서 石農의 門人이 되었음
崔 愿
∙李宅求(己酉/全州/서산/鍾欞의 子)
∙崔愿 : 丙申 生, 鎭川 居住


간재 선생은 문인록에 등재된 제자만도 46명으로 태안과 서산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풍이 후대까지 이어지지는 못한 듯하다. 그를 태안으로 초빙한 최명희가 스승에 앞서서 타계하였고, 그 뜻을 따라 서산 대산면에 거주하는 김건주가 다시 제자를 모아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화도연원록』의 「사숙론」의 내용으로 판단컨대, 김건주 자신도 후일 함평으로 옮겨 산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간재를 따르는 태안․서산의 후학들은 진천(鎭川) 태생의 간재 문인 석농 오진영에게서 주로 수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899년 전우가 태안을 떠난 후 최명희는 스승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향현사(鄕賢祠)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스승보다 오히려 먼저 세상을 떠나니, 최명희의 동문들이 그 뜻을 이어 받아 1929년에 사우(祠宇)를 짓고 토담을 축조하여 제향일(祭享日)을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로 정하여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 후 40년이 지난 1969년 9월 9일에 사림(士林)들의 동의에 따라 최명희의 영정과 위패를 안양사에 함께 봉안(奉安)하게 되었다. 위 내용은 『태안군지』의 문화재와 사적지 가운데 누정과 사당편에서 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