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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난사(蘭史) 조희천(趙羲天)선생
작성자 태안문화원 등록일 2016-05-24 조회 1159
첨부 jpg 난사(蘭史) 조희천(趙羲天)선생.jpg

 

난사(蘭史) 조희천(趙羲天)선생

(1) 가계와 성장 배경
조희천(趙羲天, 1845~1924)의 자(字)는 중오(中五), 호(號)는 난사(蘭史), 본관(本貫)은 평양(平壤)이다. 조희천은 고려 충렬왕 때 정숙공(貞簫公) 조인규(趙仁規, 제5세)의 둘째 아들 연(璉)의 후손이다. 조인규는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선충익대 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으로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진 까닭에 본관을 평양(平壤)으로 하고 있다. 조인규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였는데, 장민공(莊敏公) 서(瑞)는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충숙공(忠肅公) 련(璉)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문정공(文貞公) 후(瑋)는 삼사사(三司使)를 지냈으며, 위(瑋)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졌다. 련의 가계는 다시 제10세 숙종(叔宗)에 이르러 분파되었는데, 숙종의 벼슬이 대사헌인 까닭에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가 되었다. 조희천은 숙종의 장자 진경(晉卿)의 후손으로, 현재는 사직공계(司直公系)로 구분되고 있다. 『蘭史遺稿』의 祭文에는 趙羲天이 檜谷公派의 門長이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20세기 초반 대사헌공[叔宗]이 아니라 그 祖父 檜谷公을 派祖로 삼는 檜谷公派 宗中이 조직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최근 간행된 『평양조씨 대동보』에 따르면, 1480년 진경의 장자 팽령(彭齡)이 숙부 요경(堯卿)과 준경(遵卿)과 함께 태안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실제로 사직공계, 요경의 후손[通德郞公系] 및 준경의 후손[監察公系]이 각각 태안군 원북면 대기리와 서산 지곡면 일원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한편 입향조 팽령의 손자 광림(光林)은 그 아들 목(穆)․직(稙)․확(穫)과 함께 곽재우(郭再祐)의 의병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玄風 景忠齋의 倡義錄에 실려 있다고 한다. 『蘭史遺稿』와 『평양조씨 대동보』 참조.

조희천의 직계 선대를 살펴보면, 위로 5대조 유제(由濟)가 품계를 받았을 뿐 사환이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원북면 대기리에 거주하는 같은 사직공계의 19세 동관(東觀, 1709~1764)은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다. 같은 원북면에 거주하는 통덕랑공계의 22세 존화(存華, 1804~1889)는 1885년 을유식(乙酉式)에 부방(付榜)하여 성균관 생원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으며, 족보에는 90세의 나이로 벼슬을 받았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86세의 나이에 작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에 따라 아버지 의석(毅錫)은 가선대부 호조참판, 할아버지 수연(壽延, 1737~1780)은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증조 중익(重益, 1702~1772)은 통훈대부 사복시 정(司僕寺 正)의 증직을 받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희천의 가계는 1480년에 입향한 이래 19세기까지도 사환이 이어진 태안의 사족 가문 가운데 하나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조희천은 대기리에서 1845년(헌종 11) 아버지 존항(存恒, 1813~1886)과 어머니 영산 신씨(靈山辛氏) 용근(龍根)의 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진 6] 조희천 생가지 아버지 존항은 일가인 성균관 생원 존화와 함께 글을 읽고 시를 읊으며 글씨를 잘 써서 주위에서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조희천의 집안은 태안 지역에서 부유한 가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글을 보면,

… 큰형님 휘(諱) 존하와 동생 휘 존한과 더불어 우애가 돈독하여 항상 백가지 일에 한결같이 큰형님의 지도를 따랐다. 더욱이 9년이나 거듭되던 흉년을 당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굶주려 목숨을 온전히 할 수 없을 때, 세 집안 가솔이 30~40명에 이르렀으나 흉년을 당하여서는 서로 구제함이 마땅한 일이라 하여 땅을 팔아 곡식을 무역하여 생활의 방도로 삼았다. 9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매각한 전답이 10여 석지기(石落)에 이르렀는데, 큰집과 작은집의 가솔들은 흉년인지 아닌지를 모르며 온전히 생활하였다 (趙羲天, 『蘭史遺稿』卷 2, 「先考石溪公行狀」)고 하여 조희천 가문이 상당한 전답을 소유한 재력가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여유로 인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하는 데에 그리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9년의 흉년이 지난 뒤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이러한 경제력으로 인하여 계속 과거에 응시하는 등 학업(學業)과 과업(科業)을 계속적으로 할 수 있었던 셈이다.

(2) 생애와 업적, 그리고 태안 교육에 미친 영향
조희천은 어려서부터 언사(言辭)가 강직(剛直)하고, 의용(儀容)이 단정(端正)하였다고 전한다. 25촌 당숙인 연소(蓮巢) 조존화(趙存華)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하였는데, 머리가 명석하여 감히 다른 학동(學童)들이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조희천의 학맥을 자세히 알 길은 없다. 단지 부친인 존항과 먼 친족인 조존화(趙存華)에게서 배웠다는 사실이 전부이다.
(『蘭史遺稿』에 趙羲天이 쓴 「蓮巢先生行狀」이 실려 있다.)
존항과 존화는 이웃에 살고 있어서 매우 친하게 교류하던 사이였다. 또한 두 사람은 당시 근방에서 가장 학덕을 갖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존화는 어려서부터 시(詩)에 능하여 신동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1858년 호서(湖西) 무오식(戊午式)(즉 충청감영에서 치르는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서울에서 열리는 회시(會試) 會試란 1차 시험인 중앙과 지방의 初試에 합격한 사람이 서울에서 다시 보는 시험인 覆試를 말한다.)에는 입격(入格)하지 못하였다. 1884년 갑신식(甲申式)에서 다시 초시에 선발된 뒤, 다음 해인 1885년 봄에는 80세가 넘은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는 평생토록 독서(讀書)와 시부(詩賦)에 몰두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문인이 수백인 이었다고 전한다. 사후(死後)에는 호우(湖右)의 사람들이 그의 학덕을 기려 향현사(鄕賢祠)에 배향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 趙羲天, 『蘭史遺稿』卷 2, 「蓮巢先生行狀」)
1927년 이민녕이 편찬한 『서산군지』에도 태안 고을의 문사(文士)들이 모두 그 문하였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조존화는 조희천 이전 태안지역의 교육을 선도하여 이끌어 가던 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희천은 대체로 부친과 조존화의 학문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간재 전우를 태안지역으로 모시고 왔으며, 근흥 안기리에서 서당을 하고 있었던 노백(老栢) 최명희(崔命喜) (『蘭史遺稿』卷 3에 노백 최명희가 난사 조희천에게 전한 序가 실려 있으며, 그 내용 중에 “난사에게 질의하여 함께 힘쓰고 또한 현세와 미래의 사람이 함께 천지로 더불어 한결같이 방대하며 같이 오래 均壽함을 연구하였네.”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서로 간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와도 상당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기호학파 계열의 학자로 보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의 문집 『난사유고』에는 최명희, 그리고 같은 동문이었던 운포(雲圃) 김익범(金翼範)과 함께 흥주사(興住寺)에서 어울렸던 시 「여김운포익범최노백명희유어흥주사(與金雲圃翼範崔老栢命喜遊於興住寺)」가 실려 있으며, 최명희는 『난사유고』의 서문을 짓기도 하였다.
선생은 특히 시작(詩作)에 능한 대문장가(大文章家)로서 위풍도 늠름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유학자로서 태안에서 평생토록 학문을 닦으며 후진의 교육과 지역민들의 교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문집 『난사유고(蘭史遺稿)』에 수록된 글을 보면, 교유인물이나 활동상황 등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경이정(憬夷亭)을 중수할 때에도 상량문을 썼으며, (「憬夷亭重修上樑文」 『蘭史遺稿』) 향교에서 유생들을 가르쳤고, 56세 때인 1901년에는 선친에 이어 향교의 중수기를 썼다. (『蘭史遺稿』「校宮重修懸板記」.이에 따르면 1871년 중수 때에는 조희천의 父親 趙存恒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기문에 따르면, 부친인 조존항도 1871년 향교의 중수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바, 조희천의 집안은 대대로 태안향교의 향안이나 청금록에 등재된 집안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난사유고』의 「발문(跋文)」에는 향교에서 강의를 열 때마다 조희천이 초빙되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그리고 같은 기록에 원근(遠近)에서 종학(從學)하는 자가 항상 수십 인이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희천은 부친 조존항과 스승 조존화를 이어 태안의 유학교육에 선도자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직단․백화산․백사장 용추(白沙場龍湫) 등에서의 기우제문(祈雨祭文)을 썼으며, 관찰사․군수 등의 선정비문(善政碑文)을 작성하였고, 향약(『蘭史遺稿』에 藍田呂氏와 栗谷의 鄕約을 따라 향약을 실시하였다는 「鄕約契序」가 실려 있다.)을 설립하여 고을 주민들의 교화에 힘쓰는 등 태안 유림의 중심인물이었다. 『난사유고(蘭史遺稿)』의 「향약계서(鄕約契序)」에 의하면, 조희천은 몇몇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남전여씨향약과 율곡 이이의 향약을 모방하여 향약을 설립하였다고 한다. 다만 자세한 내용이 전하지 않아 그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할 수는 없다. 또한 평양 조씨 종중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蘭史遺稿』의 祭文에 의하면 趙羲天이 檜谷公派의 門長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유림들이 그러했듯이 동학농민전쟁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甲午東亂守城所記」 『蘭史遺稿』.
그러나 난사 선생은 태안 지역을 크게 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에 수록된 글을 보면, 대체로 서산과 태안의 인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1860~1924) 선생에게 올린 글에는 ‘삼가 올린다’는 뜻으로 ‘敬呈’이라는 표현을 서두에 달았으며, 지산 선생의 부음(訃音)을 듣고는 바삐 참례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를 지탱했던 성리학자로서의 면모와는 달리, 선생은 새로운 서구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직접적인 증거가 1905년 태안 최초로 설립된 태안초등학교의 전신 화양의숙(華陽義塾)과의 관계, 그리고 그를 주도했던 태안 남문리 속칭 ‘환동 이씨’와의 관계이다. 개인적으로는 화양의숙(華陽義塾)을 세운 이희열(李希烈)의 회혼례(回婚禮)에 축시(祝詩) 「하환동이참판희열회혼례(賀環洞李參判希烈回婚禮)」를 지었으며, 장례식에서는 만사(輓詞), 참고로 이희열의 장례에서는 같은 집안의 남석(南錫)과 필현(弼顯)이 또한 만사를 바쳤다. <조희천의 계보도> 참조.
그리고 이희열의 차자 이기훈(李基訓)의 시묘살이를 칭송하는 시 「讚李議官基訓善居喪」.와 효행을 알리는 통장(通狀), 「前議官李基訓孝行通狀」 『蘭史遺稿』. 장자 이기석(李基奭)의 수연(壽筵)을 축하하는 시 「環洞李高敞基奭壽筵」. (이기석은 高敞郡守를 지냈다.) 등을 남겼다. 또한 선생의 문집 『난사유고』에는 화양의숙을 창설(創設) 때에도 그 감회를 읊은 시 「화양의숙창설회(華陽義塾創設會)」가 있고, 五載三登此一堂 天荒打破頌聲長 黃華酌酒人情洽 白日歌詩士價香 四里損金先買義 十年啄玉乃成章 前期正在勤然後 須惜窓西轉夕陽. 華陽義塾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상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1910년 65세의 나이 때 화양의숙을 이건(移建)할 때에도 그 내력을 지은 글 「사락정개작학교기(思樂亭改作學校記)」 『蘭史遺稿』.이 실려 있다. 「사락정개작학교기」는 원래 사정(射亭)이었던 사락정(思樂亭)을 교실로 개조하여 화양의숙(華陽義塾)을 증축한 내력을 담은 글인데, 아래의 내용을 살펴보면, 선생이 시대적 변화에 둔감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하여 우리 어린 선비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고 당(堂)에 올라 추전(鄒傳;孟子)과 증전(曾傳;大學)과 사전(思傳;中庸)을 때때로 익히고, 이어서 어학(語學)과 농학(農學), 율학(律學)을 배워 일취월장하면, 장차 이 풍속이 어리석은 시골이 가히 빛나고 빛나는 문향이 될 것이니, 어찌 먼 백세(百世)에 하나의 커다란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趙羲天, 『蘭史遺稿』卷 2, 「思樂亭改作學校記」. 즉 조희천은 유학자로서 『맹자』·『대학』·『중용』을 먼저 익힐 것을 언급하였지만, 이어서 화양의숙에서 교육하고 있는 어학(語學)․농학(農學)․율학(律學) 등 신학문이 장차 태안지역의 발전에 중요함을 언급하고 있다. 고루한 유학자가 아니라, 시대적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신학문을 통해서 지역의 발전이 가능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였던 1924년 79세로 일생을 마쳤는데, 그 문인이 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趙羲天, 『蘭史遺稿』卷 3, 「贊」.
선생의 문인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다만 문집에 글을 남긴 일부 제자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蘭史遺稿』에는 門人錄이 나와 있지 않으며, 華甲을 맞아 祝詩를 올린 인물 중에 門生으로 尹世暉․賈祐永․金翼範․李基鳳․金在羲․鄭台敎․尹世輔․金寧濟․崔命基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門生이 올린 祭文으로는 金翼範․柳澣․尹世暉․趙東鎬․金在明․金寧濟․崔中赫․文洪錫․趙羲範․趙慶鎬․柳澤․韓泰洙 등이 합동으로 올린 글, 崔命基․李勳․李奭憲․閔奭基․尹享善․沈能浩․趙益相․金永濟․趙世顯 등이 같이 올린 글, 金翼範, 李道烈, 賈祐永, 李圭錫, 尹世輔, 沈能浩가 단독으로 올린 경우가 실려 있다.
그러나 장사를 지낼 때 문하생으로 가마(加麻)(加麻, 즉 首絰은 상복을 입을 때 두건 아랫부분에 두르는 것으로, 짚에 삼껍질을 감은 둥근 테를 말한다. 가마는 상주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제자나 친구가 하기도 한다. 원칙적으로 친구나 제자는 상복을 입을 수 없기 때문에 두건에 가는 삼끈으로 테두리를 두른다.)를 한 사람이 300여 명이었다고 하며, 선생의 사후에도 그 제자들이 삼일사계(三一社契)를 조직하여 매년 봄과 가을로 옛 강학처에 모여 경전의 뜻을 토론하고 시를 짓는 모임을 잇는 門下諸生加麻執紼號哭者 三百餘人也 且設三一社契 每年春秋會於舊堂 或講論經義 或唫詠風月 以爲永世紀念焉. 『蘭史遺稿』.등 그의 영향력은 자못 컸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간재 전우가 잠시 태안지역에 머물면서 유풍(儒風)을 진작시켰다면, 조희천은 자신의 향촌인 태안에서 평생토록 유학자로서 향촌교화와 후학의 교육에 매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희천 묘소 저서(著書)로는 난사기(蘭史記)가 있으며, 그의 사후(死後)에 후손이 펴낸 난사유고(蘭史遺稿)가 있다. 이밖에도 여러 권의 시집(詩集)이 전하고 있다.


조 희 천(趙羲天)

조선조(朝鮮朝)의 헌종(憲宗) 11년(1845)에 출생했는데, 고려 충선왕(高麗 忠宣王)때의 공신(功臣) 조인규(趙仁規)의 후손으로 호를 난사(蘭史)라 했다. 어려서부터 한문(漢文)을 수학했는데 머리가 명석하여 감히 다른 학동(學童)들이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시작(詩作)에 능한 대 문장가(大 文章家)로서 위풍도 늠름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 강점기(日本 强占期)었던 1924년에 79세로 일생을 마칠 때는 무려 500여명의 조객(弔客)이 모여 그의 마지막 길을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저서(著書)로는 난사기(蘭史記)가 있으며, 그의 사후(死後)에 후손이 펴낸 난사유고(蘭史遺稿)는 널리 알려진 책이다. 이밖에도 여러권의 시집(詩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