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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려당(遠慮堂) 이희열(李希烈) 선생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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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원려당(遠慮堂) 이희열(李希烈) 선생
작성자 태안문화원 등록일 2016-05-24 조회 1468
첨부 png 이희열선생.png

 

3) 원려당(遠慮堂) 이희열(李希烈)

(1) 가계와 성장 배경
태안초등학교의 전신은 원려당 이희열(遠慮堂 李希烈, 1831~1918)이 설립한 1905년 화양의숙(華陽義塾)이다. 이희열의 자는 수경(壽卿), 호는 원려당(遠慮堂)이다.
현재 그의 관향은 고성(固城)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담은 『원려당행록(遠慮堂行錄)』이 초간된 1926년 무렵까지도 주변의 인정을 받지 못한 듯, 서천 이씨 이석진(李錫晉)과 3남 이기석(李基奭)이 쓴 행장(行狀) 등에만 ‘이괄의 변란으로 피해를 입을 것을 피하여 해미(海美)로 피하였던 이희열의 11대조 이복령(李福齡)이 고성을 버리고 어머니 진주 유씨의 관향을 따라 진주(晉州)로 바꾼 사실을 특기(特記)’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행록 대부분에도 이희열은 진주인(晉州人)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정은 1937년에 간행된 가보(家譜)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범례 첫 조항에도 “고성이라는 관향을 바꾸어 진주로 하여, 지금에 이르러 족보를 꾸미게 되었다. 따라서 진주로 바꾼 후부터 (족보를) 시작하고 고성을 관향으로 삼은 선조(先祖)는 별도로 수록한다.” 自固城改貫晉州而今此修譜 以晉州爲始 故固城先祖別錄于卷端.
고 하였다. 이는 태안을 넘어서 충청도에서 손꼽힐 정도로 경제적 부를 축적하여 집안을 일으킨 이후,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향을 되돌리기 힘들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자료이다. 조선 말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동안의 급격한 신분 변동과 관련된 좋은 사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완산이씨 李鐘淳이 쓴 家譜 序에 ‘혹자는 영조조 문신 晉州李氏 李致彦과 同宗으로 혼동하는 일이 있으며, 譜系를 명백히 하여 고성에서 진주로 籍을 바꾼 同貫異族임을 세상에 병백히 밝히겠다.’ 한 기록은 참고가 될 만한 자료이다. 그러나 본고의 목적에서 벗어나므로 이에 대한 상론은 생략하고자 한다.
1937년 간행된 족보에서 밝힌 바처럼, 복령(福齡)부터 그 현손(玄孫)까지의 행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가계의 행적이 뚜렷해지는 시기는 제5세 선웅의 두 아들 원발과 운신 형제 때부터이며, 나머지 지파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선웅과 두 아들, 그리고 차자 운신의 장자와 장손은 납속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품계와 산직(散職)을 제수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정도로는 가문이 유지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초반까지 속칭 ‘환동(環洞) 이씨’의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묘소를 실전하고, 휘(諱)조차 전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원발과 운신 형제, 그리고 운신의 장자․장손에게 제수된 품계와 벼슬이 오히려 주목된다. 이와 관련한 유일한 자료는 태안보통학교(泰安普通學校) 제2대 교장 풍전호지조(豊田號之助, 1917년 4월~1920년 1월)가 미완성인 채로 남긴 원고를 정리하여(1921년 5월) 『원려당행록』에 수록된 글 『이희열사적(李希烈事蹟)』이다. 이 원고는 泰安公立普通學校에서 調査한 것임을 밝히면서, 이희열의 행적을 담은 『遠慮堂遺事』에 수록되었다. 『원려당유사』는 1926년 12월 『遠慮堂行錄』이라는 이름으로 태안공립보통학교에서 제5대 교장 大友喜幸이 지은 것으로 하여 발행되었는데, 1928년 3월 이희열의 長子 李基奭을 편집 및 발행자로 하고 본인의 집을 발행소로 하여 再刊되었다. 제목은 行錄에서 遺事로 바뀌었으나, 판심의 題字는 바뀌지 않은 채 遠慮堂行錄으로 되어 있고, 다만 원려당의 행장에 대한 有感 및 원려당행록을 읽은 소감을 담은 「奉讀遠慮堂行狀有感」(坡平后人 尹相大)과 「讀遠慮堂行錄」(濟州后人 高海欑)을 추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운신은 검약을 실천하여 지방에서도 두드러진 자산가가 되었고, 600석 이상을 자선사업에 투자하였으며, 『원려당유사』 중 이희열의 장자가 쓴 「府君行狀」에는 粟 1,000여 석으로 빈민을 구제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뜻을 이어받아 손자 시하(時夏, 제8세) 또한 대기근을 맞아 약 1,000석(시가 약 1,000兩)으로 빈민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입향조 복령은 인조조 화를 피하여 해미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때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태안으로 이거했다가 제6세 운신(雲信)은 도승의 말에 따라 환동(環洞, 현 태안읍 남문리)에 정착하였고, 이후 집안이 발복하여 세간에 ‘환동 이씨’라 부르게 된 것이다. 1937년 家譜에서 完山人 李鐘淳은 序文에서 白華山 李氏라고도 칭하고 있다.
환동은 ‘고리골’이라는 한글을 옮긴 한자어이다. 이곳은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인 고리 모양의 형국을 이룬다. 선대로부터 전하는 말에 따르면, ‘풍수지리에 따르면 반월(半月) 형국을 이루는데, 마을 터에는 12호 이상의 집을 짓지 말고, 지붕은 와가(瓦家)가 아닌 초가(草家)로 해야 하며, 대문은 싸리로 만들어 달고, 닭과 소를 먹이지 말아야 하며, 타성(他姓)은 들어오지 말게 해야 한다’고 한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반월 형국은 미래에 가문이 번창할 것을 지적하는 명당의 한 유형이다. 즉 반월은 아직 만월(滿月)이 되지 못하였지만, 점점 차 올라 장차 만월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만 고리골이라는 지명처럼 원형의 분지 지형을 반월 형국이라 해석하였다는 점이 이채롭다. 타성받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12호만으로 마을을 유지하라는 배타성과 아울러, 초가집에 싸리문으로 집을 지으라는 부분이 관심을 끈다. 환동의 종가 이경열과 이희열의 가옥은 지붕만 기와로 바뀌었고, 지금까지 온존히 보존되고 있다.
환동 이씨들의 신분적 지위를 짐작케 해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닭과 소를 키우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 또한 농업에 종사치 말라는 유훈(遺訓)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태안의 옛 포구와 길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872년 「태안지도(泰安地圖)」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청구기호 : 10422).
를 보면, 태안 읍치에 가까운 포구는 남쪽 10리 거리의 장명포(長命浦)가 유일하다. 趙羲天의 문집 『蘭史遺稿』에는 장명포에서 기우제를 지낸 「祈雨長明潭祭文」이 실려 있다.
그런데 관아와 장명포 사이의 길은 남문을 나와 환동을 경유하도록 되어 있고, 태안의 장시는 남문 밖 경이정(憬夷亭) 앞에 개설되어 있었다. 환동 이씨가 상업활동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증거라 할 것이다. 실제로 후손들에게까지 “돈이 ‘구질’[옛 길]에서 옆으로 빠져 환동으로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서 환동 이씨는 최소한 6세 운신 이후 어느 정도 상업적 기반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희열은 환동에서 장명포로 가는 길목에 아들을 분가시켰고, 소유주가 바뀌었으나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세 운신 이후 11세까지도 환동 이씨의 행적은 뚜렷하지 않다. 그러다가 11세 동직의 두 아들 경렬(景烈, 1829~1885)과 희열, 특히 차자 희열에 의하여 집안이 급격하게 일어선다.

(2) 생애와 업적
이희열(李希烈, 1831~1918)의 호는 원려당(遠慮堂)이며, 아버지 동직(東稷)과 어머니 문화 유씨(文化柳氏)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안 읍내 남문리 속칭 ‘고릿골’[環洞]에서 출생하였다. 이희열은 1849년 19세의 나이로 혼인을 하였는데, 부인은 현재의 근흥면 마금리에 세거하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영철(永喆)의 따님이었다. 이희열의 생애에 대한 기록으로는 「일가삼금패일공로상이가희열씨선행략(一家三金牌一功勞賞李家希烈氏善行畧)」이 가장 구체적이다. 목차에는 「서산공립보통학교행략기사」로 되어 있다. 이글은 1916년 조선총독부 촉탁(囑託) 촌상유길(村上唯吉)이 농촌개량강사(農村改良講師)로 서산을 방문했을 때 강연을 듣고 조사를 결심한 서산공립보통학교장 판원간추(板原艮槌)가 편(編)한 글이다.
그 자료와 기타 기록들을 검토해보면, 그가 27세에 분가할 당시 가옥을 신축하고 소유한 논 10마지기 가운데 3마지기를 상속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양친의 생활을 염려하여 논 3마지기는 1년 후에 본가에 되돌려 주었고, 근검절약하여 저축한 쌀 6석을 시장에 팔아서 마련한 40량(兩)을 식리(殖利)하여 130량으로 늘려서, 33세에 귀실리(貴實里, 현 태안읍 장산리 귀실 마을)의 논 5마지기를 구입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자본을 마련하여 42세에 귀실 마을에 시험적으로 염장(鹽場)을 설치하고 40여 인의 인부[雇人]를 고용하여 소금을 구웠는데, 이희열이 처음으로 鹽場을 설치하였다고 하는 곳, 속칭 ‘벗터’와 옛 포구 ‘장명포’의 위치는 서산의 향토사가 이은우의 안내로 방문하였다. 이은우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정보를 제공하여 준 바가 있다. 지면을 빌어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그 후 8~9년 동안 제염업이 활황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염전을 12개소로 확충하였고, 그 생산량이 약 2,500석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렇게 생산된 소금은 장명포를 통하여 강경․군산 등 전라도와 경기도 등지의 포구로 실려갔고, 다시 곡식과 직물[綿麻]로 교환하여 서울과 인천 등지로 판매하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이희열의 경제적 부는 염전 경영과 상업활동을 통하여 축적되었고,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집안 경영을 위하여 일정한 원칙을 세우기도 하였다. 『원려당유사』에 의하면, 1905년 가헌(家憲)을 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자녀들에게 일을 분장(分掌)하였는데, 장자는 가정사를 통괄하고[統管家政], 차자는 산업을 주관하며[主産業], 3자는 바깥일을 맡고[主外交], 4자는 농사와 임업을 맡는[主農林] 것으로 되어 있다. 「서산공랍보통학교행략기사」에는 네 아들에게 업무를 분장한 조직을 서무부(庶務部)․회계부(會計部)․사업부(事業部)․외교부(外交部)라 칭하였는데, 사업부에서 1915년(始政 5) 기념물산공진회(記念物産共進會, 朝鮮物産共進會의 異稱)에 출품한 결과 직물(織物)․산미(産米)․식림계획(植林計劃) 분야에서 3개의 금패(金牌)와 1개의 공로상을 수상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둘째, 매년 신년협의회(新年協議會)를 열어 전년에 마무리하지 못한 일과 당년 예정사업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결의하도록 하였다. 신년협의회와 관련하여 1905년의 「을사신년협의회안(乙巳新年協議會案)」이 실려 있다. 그 내용 가운데에서는 축우(畜牛)․전곡(錢穀) 등의 장부 정리, 20세 이상 청년에 대한 회계업무 윤번제 시행, 소작인을 대상으로 한 농계(農稧) 설립 등의 조항이 실려 있다. 그 구체적인 실상은 확인할 수 없지만, 거의 기업에 가까운 형태로 가정경제를 경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이와 관련하여 이희열의 아들 경렬․희열․병열 등 3형제와 그 자손 10여 호 24인이 모두 환동에 모여서 거주하였다고 하며, 또한 이희열 내외를 위하여 백화산 아래 쌍학정(雙鶴亭)을 지어 학처럼 장수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상당한 경제적 부를 축적한 후에도 근검절약은 언제나 강조되었다. 81세의 신해신년잠(辛亥新年箴)의 내용을 살펴보면, 유아에게 사농공상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고, 또한 나무와 채소 재배 또는 양계(養鷄)와 양봉(養蜂) 등을 놀이로 삼아야 한다고 했으며, 노인도 힘에 부치지 않게 일을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놀이패를 집안에 들이지 말고 즐기지도 말 것을 훈계하고 있다. 1916년 제1회 모임을 가진 친족강화회(親族講話會)의 내용을 보면, 부드럽고 따뜻한 의복을 입으면 신체가 허약해진다고 하고 있으며, 길경사(吉慶事)에 가서는 20분, 애흉사(哀凶事)에는 15분 이상 머물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희열은 또한 경제적 부를 배경으로 납속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원려당유사』에 따르면, 1886년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받은데 이어, 1900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차하였고, 1902년에는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의 직을 받았다. 또한 1910년 11월 3일 조선총독부로부터 기로은사금(耆老恩賜金) 50원을 하사받았고, 1913년 6월 27일에는 상훈국(賞勳局)으로부터 삼중은배(三重銀盃) 1조(組)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경제적 부는 가까운 친지를 위한 진휼에 사용되었다. 우선 1902년 가난한 친족원을 구제하기 위하여 논 20마지기를 내놓았고, 그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추가로 80마지기를 기부하였다. 당시 기부한 토지 소재지와 면적, 그리고 賭地에 대해서는 『원려당유사』에 수록된 ‘親族共有財産管理規約’에 자세하다.
그 결과 1902년(壬寅)~1913년(癸丑) 봄까지 12년간 혜택을 입은 경우가 270여 가구로 전해지는데, 관련 기증증서(寄贈贈書)와 규약이 『원려당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1913년에는 나락[租] 400석을 태안군(당시 태안군 현황 : 13면 206리 7,414호)에 기부하여 산업저축기금으로 활용하였다. 공동농계(共同農契)를 설립하고, 백화산(白華山) 동남쪽 황무지에 농장을 개설하는 등의 활동도 빈농의 생활개선과 일정한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선행의 결과 1909년(己酉) 회혼례(回婚禮)에는 수 천명의 하객이 모이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석진의 행장에는 3,000여 명, 장자 이기석의 행장에는 5,000여 명으로 되어 있다.

이희열은 1918년 정월 7일에 사망하였다. 『원려당유사』에는 그의 묘소는 태안면 상옥리 흥주사(興住寺) 남록(南麓)이고 부인의 묘소는 부좌(祔左)로 되어 있다. 그런데 1937년 『가보(家譜)』에는 예산 대흥면 노동리이고 부부가 합폄(合窆)으로 되어 있어서, 그 사이에 천장(遷葬)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사후 행장은 석매(石梅) 이석진(李錫晉)이 찬하였다. 이희열은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자 이기석(李基奭)은 고창군수와 서산군수 등을 역임하고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고, 차자 이기훈(李基訓)은 중추원의관, 4자 이기승(李基升)은 서산군수와 해미군수를 역임하였다. 큰 사위는 강령군수(康翎郡守)를 지낸 유제언(柳濟彦)이고, 둘째 사위는 시어성기학 주사(侍御成耆鶴主事)를 지낸 박기동(朴基仝)이다. 해방 후 제1대 충청남도지사를 역임한 이영진(李寧鎭)은 이희열의 3자 이기상(李基祥)의 아들인데, 장자 이기석에게 입후하였다.
태안과 관련하여 이희열의 큰 공헌 가운데 하나는 군내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절을 달리하여 다루게 될 것이다. 또한 이희열 생전에 조직했던 산업저축계(産業貯蓄契)는 1922~1929년 사이 원 태안군 각 면에 설치된 공립보통학교 건립의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려당유사』에는 面立普通學校로 되어 있으나, 공식 명칭은 公立普通學校이다. 『忠淸南道發展史』(湖南日報社, 1932)에 의하면 大正 11년(1922)에 近興面과 梨北面에, 대정 12년에 所遠面에, 昭和 4년(1929)에 南面에 각각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와 관련된 기록은 『원려당유사』 「구제사업(救濟事業)」편에 수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이희열은 1913년 3월 14일 서산군과 통합되기 이전 태안군에 속했던 13개면 206리(里) 7,414호를 대상으로 저축장려기본조(貯蓄獎勵基本租) 400석을 기부하였다. 그 가운데 환동(環洞)의 규약[産業貯蓄契規約]을 보면, 설립일로부터 5년 동안 증식한 연후에, 빈곤자에게 연 2할 5푼의 이율로 양식과 종자를 대여해주고, 농업개량과 산업을 장려하며, 납세자료(納稅資料)의 기본준비(基本準備)를 행하고, 재해를 입은 경우에 구조를 행하는 사업을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수록된 곡물분배의뢰의 건(穀物分配依賴의 件)을 보면, 해당 각리(各里)에 평균분배(平均分配)를 행한 것으로 되어 있고, 기부조분배건(寄附租分排件)에는 각 면(面)의 호수를 파악한 후에 1두 7홉(合) 9작(勺)씩으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그 뒷부분에 수록된 장자 이기석의 추기를 보면, 산업저축계가 설립되어 6년 째였던 1918년 206개리에 설립된 앞의 산업저축계의 재산이 몰수되어 면립보통학교(面立普通學校) 건축비로 전용되었고, 그로 인하여 이희열의 후손들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면서 몇 년 동안 집안 사람들이 침통함을 금치 못하였고, 계의 창립을 장려했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취지서 등을 발송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으며, 군면(郡面)의 당국자들이 이 재산으로 인하여 부담이 경감되었다고 설득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3) 화양의숙과 태안초등학교
이희열의 나이 75세였던 1905년 9월 시대의 변천에 맞추어 백화산 남쪽 옥하리(沃下里)에 15칸 규모의 집을 구입하여 화양의숙(華陽義塾)을 개설하였다. 최근까지도 華陽義塾보다 안면도의 廣英新塾이 먼저 설립되었으며, 그 설립년도 또한 1907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오류에 대해서는 태안문화원의 정우영 원장이 기록을 검토하여 사전에 확인하여 준 바가 있다.
학용품[紙筆]을 제공하면서 수업료[月謝金]를 면제하였는데, 가르친 과목은 윤이(倫彝)․지지(地誌)․역사․산술(算術)․일어와 영어[日英語]였으며, 당시 교사는 4명이었는데, 한규석(韓圭錫)․김영제(金寧濟)․황희성(黃羲性)․이순택(李淳鐸)이다. 2년 후에는 지방의 실용적인 필요성 때문에 3개월 속성반으로 측량학(測量學)을 부설했는데 교사는 손성진(孫誠鎭)이었으며, 그 후 5개월 속성반의 조림학(造林學)을 개설하여 교사 최태현(崔泰鉉)을 초빙하였고, 다시 숙감(塾監) 김병선(金炳善)을 초빙하였다. 1910년에는 입학을 원하는 학생이 80여 명으로 급증하면서, 옛 활터[射亭, 思樂亭을 말함] 건물 6칸을 보수하고, 추가로 북쪽 터에 2개의 교실을 신축하였다. 그 비용은 여러 경로로 마련되었다. 우선 옛 교사(校舍)를 매각한 대금 450원과 이희열의 기부금 800원 외에도, 이기홍(李箕洪)의 100원, 김동희(金東熙)의 50원, 백락민(白樂旻)의 40원, 손창현(孫昌顯)의 40원, 이종규(李鍾圭)의 30원, 이기현(李基顯)의 20원, 김기선(金基善)의 20원, 박종언(朴鍾彦)의 10원, 강홍린(姜洪麟)의 10원, 이순삼(李順三)의 10원 등 총 330원, 그리고 태안읍 동문리의 33석, 옥하리의 40석, 남문리 소례계(昭禮禊)의 60석 등 총 133석이 모금되었다. 「일가삼금패일공로상이가희열씨선행략」에는 1906년(光武 10) 화양의숙(華陽義塾)을 설립하여 3자 이기상(李基祥)이 교주(校主)가 되고 이순택(李淳鐸, 집필 당시 서산군 書記)과 한규석(韓圭錫) 등 2인을 교사로 초빙하여 친척 15~20세 사이의 13명에게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1년 6개월 후에 학생이 80인으로 증가하자 개인 돈 800원과 더불어 사정(射亭) 6칸을 기부받고 새로이 교사(校舍) 1동을 신축하였으며, 1909년 제1회 졸업생 25인을 배출하였고, 시대의 변천에 맞추어 5개월 기간의 임학(林學)에 20인의 학생과 3개월 기간의 측량(測量)에 30인을 양성하는 임시 속성반 강습을 행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그 후 1911년 시설 등 일체를 정부에 제공하여 태안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기까지, 최초 2년 동안 월사금을 받지 않았으며, 그 후 무상으로 제공한 학용품과 교사의 급여 연 500원 등을 합하여 그 운영비가 3,000원에 달하였다고 하였다. 1991년 간행된 태안초등학교의 『開校八十年史』에도 이 기록을 바탕으로 연혁을 기술하고 있는 바, 『원려당유사』의 「興學校」의 내용과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현재로서는 이를 확인할 추가 자료는 없다.

그러나 화양의숙은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이 공포됨으로써 관련 시설 일체가 정부에 기부되어 1911년 10월 1일을 기하여 태안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당시 학교 위치는 현재의 태안읍 남문리 191-3번지였고, 제1대 교장은 일본인 내등순장(內藤順藏), 교사는 3인, 그리고 2학급에 학생 46명이 있었으며, 1913년 3월 25일 제1회 졸업생 11명을 배출하였다. 개교 이후에도 태안공립보통학교의 교세는 계속 확장되었다. 1912년 7월(건평 27평, 공사비 999원 15전)과 1913년 8월(건평 27, 공사비 830원)에 각각 교실 1동을 증축하였다. 1920년 9월에는 원래의 학교 부지와 건물을 모두 이시우(李時雨)에게 매각하고, 남문리 303-3번지로 이전하였다. 이전에 따라 교실 5칸(100평, 공사비 25,000원)이 신축되었으며, 운동장 3,115평, 화단 325평, 학교 소유 실습 전답 466평 등이 있었다. 그 후에도 확장공사는 계속되어 1921년, 1923년, 1924년, 1926년에 각각 교실 1칸을 신축하였다. 1926년 5월 교실 1칸의 공사비는 2,700원이었다.
그 후에도 학생수가 급증하면서 1938년에는 교실 2칸, 1943년에는 5칸 등의 신축이 있었다. 1926년 5월 실습지 420평(평당 43전)을 구입하였으며, 1926년 12월에는 운동장(977평)을 확장하였고, 1927년 5월에 도작실습지(稻作實習地) 383평(420원)을 매입하였으며, 1927년 6월에는 양잠실 10.5평(600원) 및 양계장(1평, 이하 공사비 총 280원), 농기구창고(2평), 퇴비장(2평 2合 5勺) 등을 건립하였고, 1928년 5월에는 학교에 인접한 남문리 토지 526평(평당 34전)을 매입하였다. 1923년 10월에는 학교의 교기(校旗)가 제작되었고(李時雨 기부), 1931년 9월에는 개교 20주년 기념행사로 운동회와 학예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1931년 10월에는 한문과(漢文科)가 폐지되고, 1936년과 1937년에는 학교 후원에서 경영하는 특별학급이 개설되기도 했는데, 첫 해에는 80명(남 50명 여 30명), 이듬해에는 73명이 수학하였다. 일제의 간섭에 의하여 졸업생들을 동원하는 조직도 결성되었는데, 1929년 9월 9일에는 태안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태안청년단결단(泰安靑年團結團)이 조직되었고, 1934년 7월 13일에는 흥농청년단(興農靑年團)을 지정하라는 지침에 의하여 평천리(平川里)에 단원 12명으로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1936년 8월 30일에도 태안진흥청년단(泰安振興靑年團)이 결성되었다. 태안공립보통학교는 1941년 4월 1일 국민학교령(國民學校令) 실시로 태안공립국민학교(泰安公立國民學校)로 개칭되었다.
태안초등학교의 취학생은 당시 태안면 관내의 마을 출신이 95% 이상으로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는 1920년 안면도의 광영신숙(廣英新塾, 1906년 설립)이 안면도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된 데에 이어 근흥․이원․소원․남면 등 5개교, 1930년대에 원북․모항․황도․안흥․안중(분교), 1940년대 방갈분교가 설립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학생수는 1911년 태안공립보통학교로 개교 당시 46명에서 1944년 1,073명으로 20배 이상의 증가세를 보였다. 아래의 <표 6: 태안공립보통학교 연도별 학생 및 직원 현황(1912~1945)>에서 확인되듯이 『학교연혁지』의 다른 곳에는, 특히 1944년 재적생의 숫자가 1,502명으로 다르게 되어 있다. 이는 일제 말엽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경우를 정정하지 않은 때문으로 짐작된다.
특히 거리가 가까운 태안면 일원의 학생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태안초등학교의 신입생 현황을 살펴보면, 우선 점진적으로 여학생의 비중이 증가함을 확인할 수 있다. 1917년 이후 현황을 보면, 남녀 신입생 정원이 별도로 책정되어 있고, 실제로 1930년대에 들어서는 전체 지원자의 30% 이상을 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25년까지 여학생이 졸업한 경우는 없으며, 또한 상급학교로 진학한 사례도 찾아볼 수 없다 (<표 6: 태안공립보통학교 연도별 학생 및 직원 현황> 참조). 이는 대체로 문맹을 면하는 정도 이상의 여성 교육을 기대하지 않았던 탓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여학생의 상급학교 진학 사례도 증가하고 있으며,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간간이 여학생이 졸업 후에 직업을 갖는 사례도 확인되고 있어서, 점진적으로 전통질서가 약화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1940년대 전체 졸업생의 급증은 근대교육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신입생의 연령이 후대로 갈수록 낮아진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1920년대까지 20세 전후의 신입생 또는 고학년으로 편입하는 사례가 많았으나, 점차 일부 고학년 편입생을 제외하면 고령자의 입학은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태안초등학교를 거쳐간 교원은 일일이 거론할 수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역대 교장을 거론하는 선에서 그치고자 한다. 그 현황을 살펴보면, 한국인 2인을 포함한 총 14명이 재임하였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 25일에는 안명선(安明善) 교장이 부임하였고, 교직원 가운데 상당수가 퇴직하거나 다른 곳으로 전근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 때문인지 1946년 졸업식은 6월 29일에, 입학식은 9월 1일에 거행되었다. 당시 졸업생은 남학생 114명, 여학생 48명 등 총 162명이었으며, 신입생은 남학생 342명, 여학생 121명 등 총 463명이었다. 1959년과 1960년에는 연이은 교사(校舍) 신축공사가 있었다. 1960년에는 어은분교(1948년 설치), 1964년에는 화동과 송암분교(1963년 설치)가 각각 독립되었고, 1996년에는 초등학교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05년 2월 현재 졸업생은 총 19,731명(1945년까지 1,683명 포함)이며, 교직원은 52명이고, 각 학년이 6개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재학생은 1,253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