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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紹庭) 김병년(金炳년)선생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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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정(紹庭) 김병년(金炳년)선생
작성자 태안문화원 등록일 2016-05-24 조회 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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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정(紹庭) 김병년(金炳䄵)

(1) 가계와 성장 배경 

갈뫼에 세거하던 안동 김씨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후예로서, 세간에서 ‘갈뫼 김씨’로 불려지는 충청도의 대표적인 명문가 가운데 하나이다. 홍주의 안동 김씨는 수북(水北) 김광현(金光炫, 1584~1647)을 입향조로 하는 수북공파이다. 수북공파에 대한 논의는 김영한의 글과 면접 자료를 정리하였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김영한, 2005, 「충청도 세거 안동 김씨의 가계와 인물」 (『일동장유가의 퇴석 김인겸』,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한어문교육학회).
홍주목사를 지냈던 김광현은 아버지 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후, 홍주 오촌동(鰲村洞)에 은거하다가 타계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일대에 세거하였으므로 세칭 ‘갈뫼 김씨’라 하는 것이다. (<김병년의 계보도> 참조)
갈뫼 김씨가 비록 홍주에 세거하였으나 서울과의 교류가 계속되었고, 특히 청음 김상헌의 대종가를 비롯하여 서울에 거주하는 여러 지파에 누대로 입양하였다. 또한 한말에 이르기까지 사환도 끊이지 않았으며, 한국을 대표하기에 충분한 인물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1860~1924)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였고, 승정원 승지로 있던 중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나,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개화파의 거두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은 벼슬이 좌참찬에 올랐으며, 1844년 90세의 나이로 궤장을 하사받았던 인물로서, 그의 손자 현근(賢根)이 부마도위로서 동녕위(東寧尉)가 되었다. 독립운동가인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1889~1930) 또한 수북공의 후손이다. 그 외에도 여류 문장가로 이름이 높은 호연재(浩然齋, 1681~1722), 독립운동가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 등도 모두 같은 일가이다.

(2) 생애와 업적 

김병년(金炳䄵, 1855~1932)의 자는 성연(聖淵), 호는 소정(紹庭), 본관은 안동으로, 1855년 홍주목 갈뫼에서 아버지 봉근(鳳根)과 어머니 진주 소(蘇)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부인은 한산 이씨 용직(用稙)의 따님이다. 1887년(고종 24) 별시(別試) 병과(丙科) 7등으로 급제하면서 그 해 12월 곧바로 부교리(副校理, 종5품)에 제수된 이후, 『승정원일기』 고종 24년 12월 22일(甲辰)조; 『일성록』 고종 24년 12월 22일조.
순탄한 벼슬살이를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임금이 명에 따라 교리(정5품)로 승차하였으며, 『승정원일기』 고종 25년 정월 20일(壬辰)조.
같은 해 5월에는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자리를 옮겼고, 『승정원일기』 고종 25년 5월 27일(무인)조.
10월에는 병조 정랑(正郞)으로 옮겼으나 12월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승정월일기』 고종 25년 10월 17일(을미)조; 同 12월 5일(임오)조.
1년 후인 1889년 11월 홍문관 응교(應敎)로 다시 복귀하였고, 『승정원일기』 고종 26년 11월 26일(무진)조.
1890년 윤2월에 성균관 사성(司成, 종3품)으로 벼슬이 올랐고, 『승정원일기』 고종 27년 윤2월 26일(병인)조.
같은 해 11월에는 장악원 정(掌樂院 正)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27년 11월 13일(기묘)조; 同 12월 4일(기해)조.
12월 다시 예조참의(禮曹參議)로 복귀하였고, 『승정원일기』 고종 27년 12월 18일(계축)조.
1891년 11월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일기』 고종 28년 11월 22일(임오)조; 『일성록』 고종 28년 11월 22일조.
1892년 정월에는 호조참의, 『승정원일기』 고종 29년 정월 27일(정해)조.
3월에는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으로 옮겼고, 『승정원일기』 고종 29년 3월 4일(임술)조.
1892년 4월 다시 우부승지가 되었다. 『승정원일기』 고종 29년 4월 19일(정미)조.

한편 김병년이 궁내부 승지 벼슬을 사직한 것은 1901년이라 전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1892년 이후 행적을 확인할 길이 없으며, 다만 국운이 기울어 가는 상황에 비애를 느끼면서 고향인 갈뫼로 내려와 잠시 머물렀고, 뜻한 바가 있어서 가솔을 이끌고 안면도로 들어왔으며, 이후 인재양성에 여생을 바칠 각오로 학교설립을 서둘렀다는 이야기가 전할 뿐이다. 먼저 지방유지들을 설득하여 호응시킴과 동시에 당시 주변의 대표격인 편준익(片準翊)의 사재투입과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안면도 승언리에 1906년(광무 10) 11월 10일 학교를 세우고, 같은 해 12월 28일에 대한제국 학부대신으로부터 ‘광영신숙(廣英新塾)’이라는 교명으로 승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서산군지』(1926, 한국인문과학원 영인본) 인물조에는 이와 관련하여, ‘안면도에 몸을 숨기고 섬 주민들과 협의하여 광영학교를 설립하였으니, 서산군내 (근대식) 학교의 嚆矢’라는 기록이 전한다. 金炳䄵 安東人 號紹庭 仙源金尙容后 韓哲宗六年乙卯生 性淸簡篤學博識 登文科官承旨 見世道日非逃名晦身于安眠島 興島民協議設立廣英學校敎之以新敎育 此爲本郡內設學之嚆矢 晩年移居于瑞山面獐里 終日端坐手不釋畵若將終身 其子金雨圭. 이 기록과 관련하여 서산군내 첫 근대식 학교는 華陽義塾이었음은 앞에서 살핀 바가 있으므로, 구체적인 논의는 생략하고자 한다.
한편 김병년은 만년에 다시 거주지를 서산읍내로 옮겼으며, 1926년 이민녕(李敏寧) 군수가 『서산군지』를 간행할 당시 서문을 썼다. 晩年移居于瑞山面獐里 終日端坐手不釋畵若將終身 其子金雨圭. 『서산군지』(1926, 한국인문과학원 영인본)
아들로는 김우규(金雨圭)가 있는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 유학생으로 광영신숙의 교사로서 무보수로 일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산군지』를 보면 일제강점기에 서산농회(瑞山農會) 통상의원(通常議員), 삼림조합(森林組合) 평의원, 서산보통학교 학무위원(學務委員), 서산면 면협의원(面協議員) 등으로 활동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서산군지』(1926, 한국인문과학원 영인본) 官公職員錄條.

한편 김병년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서산지단(瑞山支團)을 조직할 당시 깊이 간여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대한독립단은 3․1운동이 실패한 후, 1919년 4월 15일 만주로 망명한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박양섭(朴陽燮) 등 단체대표와 의병 계열의 인사 560여 명이 중심이 되어, 분립하고 있던 여러 단체를 해체하고 단일기관으로 만든 조직이다. 그 임원으로는 都總裁 朴長浩, 副總裁 백삼규, 諮議部長 朴治翼, 군사부장 전덕원, 총무부장 金平植, 재무부장 康世憲, 司翰長 金起漢, 부참모장 朴陽燮, 총참모 조병준, 참모 宋尙圭․康圭黙․趙膺杰․李廷根, 총단장 趙孟善, 부단장 崔永浩․金元燮, 서무 金逸, 고문 安秉瓚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독립단은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 계열의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1919년 말경에는 단군기원 또는 대한제국의 연호인 융희를 주장하는 박장호․백삼규․전덕원․李雄海․김평식 등의 紀元獨立團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호 사용을 주장한 申禹鉉․邊昌根 등의 民國獨立團으로 대립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韓族會․청년단연합회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사령부에 통합되고, 1922년 2월 류허현에서 한족회․光韓團 등 독립운동단체들과 회합, 大韓統軍府를 조직하고 발전적인 해체를 하였다.
그 본부는 류허현에 있었고, 지단(支團)․분단(分團) 등을 설치하여 국내외에 모두 100여개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고 있었다. 국내 총지단장은 洪濟業, 평안북도 鄭禹範, 평안남도 安昌一, 경기도 韓悳履 등이었다. 金承學․白義範 등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孟憲奎․劉一優 등은 만주 輯安縣과 長白縣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런 가운데 현 서산시 해미면 억대리 출신의 서병철(徐丙轍, 1893~1977) 1918년 4월 무렵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서산 일대의 유지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운동자금을 모집했다. 3․1운동 때는 서산만세운동에 가담했고, 같은 해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일원으로 가입했다. 1920년 5월 서울 鍾路區 仁義洞에 있는 全基奉의 집에서 金相玉․金東浮 등과 암살단을 조직, 친일분자를 없애고자 하였다. 1920년 10월 독립단 서산지단사건으로 붙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21년 10월 암살단사건으로 붙잡혀 1922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 대한독립단 서산지단 조직을 모색하던 중 유태길(劉泰吉) 여사의 도움으로 서산읍 장리에 거주하는 김병년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김병년과의 협의를 거친 후 안면도로 간 서병철은 오몽근(吳夢根)․이종헌(李鍾憲)․가재창(賈在昌)․임종석(林鍾錫)․임정호(林楨鎬)․염성환(廉星煥)․편무연(片茂捐)․이재국(李在國)․박준용(朴準用)․박봉래(朴鳳來) 등을 중심으로 서산지단을 구성하고 안면도를 근거지로 삼아 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밀고에 의하여 모두 체포되었고, 서병철 등은 모두 옥고(獄苦)를 치루게 되었다. 그 가운데 이종헌은 공주법원에서 2년 6월의 형량을 언도 받았으나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浣)에서 판사에게 항의를 하다가, 원심보다 무거운 4년형을 언도 받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홍주의병을 주도하였던 같은 水北公派의 후손 志山 金福漢과의 교류 사실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김병년과 관련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김복한의 경우에는 『志山集』 등 관련 자료가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대한독립단 서산지단 조직할 당시 서병철이 김병년과 협의를 했다는 점은 이미 밝혔거니와, 그 중심 인물이었던 이종헌(李鍾憲, 1890~1957)은 김병년이 설립한 광영신숙의 학생이었고,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91번지에서 奎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졸업 후에는 모교의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그 후 광영신숙의 제9대 교장이 되었는데 3․1운동 이전부터 자체적으로 대한독립결사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19년 11월 평안남도 대한독립단 검거사건에 연루된 이종성(李鐘聲)이 상해임시정부의 재무관으로 활동하던 서병철의 부탁을 받고 이종헌과 접촉하게 되었던 것이다. 4년 간의 옥고를 치룬 다음에도 이종헌은 교육사업에 전력을 쏟으면서도 또한 화수회․시제․대동계 등의 명목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일을 하였고, 해방 후에는 안면면 초대 면장으로 재직하다가 1957년 68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1977년 12월 13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또한 1990년 5월 28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315호로 지정된 태안 승언리 상여(泰安承彦里喪輿)도 김병년과 관련된 유물이라 전한다. 김병년은 한때 시강원 보덕(侍講院 輔德)의 자리에 있으면서 완화군(完和君, 1868~1880) 고종 5년 윤4월 10일 淑媛 李氏의 몸에서 탄생한 고종의 장남으로, 고종 13년4월 10일 完和君으로 봉해졌고, 고종 17년 정월 2일 세상을 떠났으며, 융희 원년(1907) 8월 24일에 完王으로 추봉되었다. 세자로 책봉하려 하면서 민비와 대원군의 갈등을 촉발시켰다고도 하며, 이에 명성황후가 독살하였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기도 한다.
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상여는 안면도 승언리 주민을 동원하여 국장을 치를 때 사용되었던 것이라 하며, 그 후 김병년은 자신이 죽으면 이 상여로 장사 지내 달라고 유언을 하여 나라에서 그 사용을 허락하였고, 그의 장례 후에도 계속 이 마을에서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상여는 현재 김병년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집 인근에 보관되어 있다. 상여는 仰帳[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상여 위로 높이 치는 천막] 틀 앞뒤에 봉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네 귀에 鬼面像이 서 있다. 용마루 앞뒤 부분에는 용틀임 모양이 조각되어 있고, 용마루 가운데에는 특이한 형상의 저승사자상이 서 있다. 流蘇[상여의 네 귀에 드리우는 매듭 장식]와 寶帳[상여에 둘러치는 휘장]이 약간 훼손되기는 했으나 부재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주요 재료는 나무이며,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고전적이며 화려하다. 상여의 크기는 길이 2.2m, 너비 1m, 높이 1.5m이다. 승언리 마을에서 소유하고, 이 마을의 새마을지도자협의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3) 광영신숙과 안면초등학교 

김병년이 설립한 광영신숙(廣英新塾)의 위치는 현 안면초등학교 북쪽 약 200m 지점이다. 당시 건물은 검은색 페인트칠이 된 함석지붕으로 1970년경까지 남아 있었다. 최초의 졸업생은 화양의숙과 같은 해인 1909년에 배출하였다. 그 설립년도는 화양의숙에 불과 1년 2개월 늦은 1906년 11월 10일이었으나, 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된 시점은 태안공립보통학교보다 8년 7개월이나 늦은 1920년 6월 5일이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원려당유사』 「구제사업(救濟事業)」편의 기록을 보면, 1918년경 서산군 각 면에 보통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안면도에는 광영신숙이라는 사립학교가 있었으므로, 다른 면보다 최소 2년 이른 시기에 개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안면도공립보통학교의 설립 인가는 1920년 2월 1일인데, 광영신숙을 인수한 시점은 6월 5일인 것으로 보아, 인수를 둘러싼 다소의 조율기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개교 당시 안면도공립보통학교의 수업년한은 4년이었다.
개교 후 1920년 10월 20일에는 본관 4개 교실이 준공되었다. 1926년 4월 22일에는 수업년한이 6년으로 연장되었으며, 1927년 1월 25일 조선식 와가(瓦家) 3개 교실이 준공되었으며, 이 건물은 1970년 11월 21일 철거되었다.
1937년 3월 20일에는 강당을 겸한 와가 3개 교실이 준공되었다. 강당은 1971년 10월 1일 철거되었다.
1938년 4월 1일에는 조선교육령 개정에 의하여 안면공립심상소학교로 개명되었으며, 1941년 4월 1일에도 교육령 개정에 따라 이름이 안면공립국민학교로, 다시 1996년 3월 1일 안면초등학교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설 간이학교(簡易學校)도 설치되었는데, 1934년 4월 2일에는 고남간이학교, 1937년 9월 20일 황도간이학교, 같은 해 11월 29일 중장간이학교가 설치되었다. 1938년 4월 1일에는 고남간이학교가 고남심상소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43년 4월 1일 중장간이학교가 중장분교로, 이듬해 같은 날자로 황도간이학교가 황도분교로 개칭되었다. 해방 후인 1947년 7월 25일에는 창기․대야도․간월도 등 3개 분교가 부설되었고, 1947년에는 중장분교가 안중공립국민학교로, 그리고 1949년 창기분교가 창기국민학교로 승격되었다. 1966년 인가되었던 방포 분실(1학급)은 1971년 방포국민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68년에는 죽도와 나치도 분교가 부설되었다. 1945년 당시 재학생의 거주지를 살펴보면, 창기리(91명), 정당리(175명), 승언리(443명), 중장리(78명), 신야리(38명) 등으로 모두 안면도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한편 광영신숙을 포함한 안면초등학교에서는 지금까지 총 8,1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안면초등학교에서는 1924년부터 여학생들이 입학하기 시작하였고, 1930년대에 들어서는 그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1940년 이후에는 상극학교로 진학하는 사례도 확인되었다. 졸업 후 간간이 상업에 종사하거나 회사에 취업하는 사례도 확인되지만, 그 비율은 많지 않은 편이다. 한편 개교 이후 1945년까지 안면초등학교의 역대 교장은 한국인 3인 포함 11인이었다.

한편 광영신숙은 서산 읍내의 근대식 교육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1908년 서산읍의 한동백이라는 청년이 안면도에 왔다가 광영신숙을 견학한 후 부친을 비롯한 인근 유지를 설득하면서 군수에게 건의하였고, 그 결과 ‘풍전신숙’이 개교하였다고 한다. 또한 광영신숙의 졸업생들이 3․1운동, 그리고 그 후의 항일운동을 주도하였음은 앞에서 살핀 바가 있다. 안면도 출신의 일본유학생도 많았다. 1922년경 유학생으로는 승언리 출신 박정래와 박동래, 그리고 일본 명치대학에 유학한 박준래도 있었다. 고남리 최동설도 서울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했으며, 장곡리 강태헌은 1922년 일본에 유학갔다가 1929년에 돌아왔다. 태안군을 포함한 일제강점기 서산군의 일본유학생이 28명인데, 그 가운데 안면도 출신이 5명이었다. 향토문화연구소, 1995, 『태안해안 국립공원의 마을 안면도 승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