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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東湖) 박채근(朴彩根) 선생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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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호(東湖) 박채근(朴彩根) 선생
작성자 태안문화원 등록일 2016-05-24 조회 1009
첨부 png 박채근선생.png

 

5) 동호(東湖) 박채근(朴彩根)

(1) 가계와 성장 배경


현 태안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태안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한 박채근(朴彩根)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 태생으로 관향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동호(東湖)이다.

방갈리는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방축리(防築里)․관갈리(貫葛里)․민어포리(民漁浦里) 등을 합병하여

방축리의 방()자와 관갈리의 갈()자를 따서 지은 이름인데,

현재는 방갈 1구와 2구로 나누어져 있다. 박채근의 생가(生家)는 방갈 2구에 해당하는 개시내(開市內) 마을에 있었는데, 개시내는 오늘날 학암포(鶴岩浦) 해수욕장(1968년 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개시내의 지명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중국과 교역하던 무역항(貿易港)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특히 질그릇을 주로 수출하였다고 해서 분점포(盆店浦)라 했다고 한다.

또한 분점포는 무역항으로서 뿐만 아니라 중선(重船)을 비롯한 많은 어선들의 출입이 잦았던 어항(漁港)으로서도 활기가 넘쳤으며, 장시(場市)가 열려서 질그릇을 파는 점포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개시내를 우리말로 풀면 시장이 열리는 안쪽이라는 뜻인 개시내(開市內)라고도 하였다 한다. 『태안군지』(1996). 


그러나 『임원경제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각종 읍지, 1910년경의 『한국수산지』, 일제 강점기의 조선총독부 조사자료에서 이와 관련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미루어, 민어포를 출입하는 어선들과의 교역이 부분적으로 행해졌을 가능성을 짐작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박채근은 밀양 박씨 봉사공파 밀양박씨 봉사공파의 파시조가 되는 세화(世華, 號 松窩)는 숭정(崇禎) 기유(己酉)년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지냈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에 증직되었다

 
그의 10대 조인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를 지낸 치순(致順)이 서산군 이북면(梨北面)에 정착하면서부터 태안에 세거하게 되었다. 방갈리에는 조부인 병우(炳宇)때 이거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병우(炳宇) 6형제를 두었는데, 박채근의 부친인 금촌공(琴村公) 선교(先敎)는 그 중 넷째이다. 족보에는 字가 先敎, 諱는 先圭로 되어 있다.

그러나 확인 결과 실제 이름은 先敎였으며, 항렬을 맞추기 위하여 先圭로 수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양상은 최근 족보를 편찬할 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임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또한 이러할 경우 본고에서는 實名을 따르게 됨을 밝혀두는 바이다.
금촌공의 여섯 형제들은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면서 방갈리 일대에 모여 살았으나,

이들의 살림살이는 전반적으로 가난했다고 한다. 토질이 척박하고 관개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서 한 해 농사를 지어도 소출이 적었으며, 그나마 가뭄이 든 해에는 벼농사는 포기하고 논에다 밭곡식을 심어 근근이 생계를 이어야만 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금촌공은 “천성이 관후 인자하고 극진지효(極盡之孝)로 향당(鄕堂)의 칭찬이 자자하였으며 세유공명(世有公名)하고 가전덕화(家傳德和)이며 친척 화목하고 인보 상조하여 세인의 모범이 되는 처세가로 알려졌었다”고 한다.

 

공은 서령 유씨(瑞寧柳氏)와 혼인하여 2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성일(成一)은 배를 타다가 풍랑을 만나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 때문에 차남인 채근이 형을 대신해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박채근은 일본계 하역회사인 조선운수주식회사에 입사하였고, 함흥지점으로 발령이 나자 자신의 근무지로 고향에 계시던 부모를 모셨다. 그는 함흥을 거쳐 원산, 청진지점 등에 근무했는데, 현재 금촌공의 묘가 북한 땅인 평강 분수령(分手嶺), 어머니 서령 유씨의 묘가 해주 용당포(龍塘浦)에 남아 있게 된 것도 금촌공과 서령 유씨가 그의 근무지를 따라 함께 생활하다가 타계했기 때문이다.

모친인 서령 유씨는 향년 65, 금촌공은 향년 80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박채근은 남북이 분단되면서 부모 묘소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을 늘 마음 아파하였고,

1970년 방갈리 생가지에 설단(設壇)하였다. 설단을 하면서 발간한 기념시첩(記念詩帖)에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못다 한 효성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不肖彩根은 三生의 累가 쌓여 萬事에 잘못됨이 많은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故鄕땅 親戚속에서 父母를 모시고 安樂한 奉養을 해드리지 못하고 生活에 쫓겨 南北으로 漂迫하다보니 兩親은 따라서 客裏辛酸을 겪어야만하셨고 …(중략) 815 解放으로 南北이 分離되니 時日을 지체하다가는 生存者도 故鄕으로 도라오지 못할 版局인지라 未死餘身도 天地의 痛恨을 안은채 回鄕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父母님 墓前에 慟哭하고 하직할세 天地가 漠漠하여 보이는 것이 없고 山川도 草木도 모두가 悲痛의 幻像으로만 明滅하여 앞을 가리어 떠러즈지 안는 발자욱을 옴기고 山程 水程에 風餐露宿으로 근근히 得達하여 依舊한 故鄕山川과 第宅을 바라보며 先塋下에 省墓하려하니 父母님 모시고 같이 오지 못한 서름만 속구처서 미칠 것만 같었습니다. (이하 생략)

(2) 생애와 업적
박채근(朴彩根, 19131975)은 성공한 실업가이자 사회사업가로 명망이 높았다.

그의 생애를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보면, 우선 24세 무렵 직장을 찾아 고향인 방갈리를 떠나기 전까지의 시기, 다음으로 인천으로 가서 조선운수주식회사(朝鮮運輸株式會社, 속칭 ‘마루보시’) 조선운수주식회사는 1962년 한국미곡창고에 피흡수 합병되었고,

한국미곡창고는 뒤에 대한통운으로 社名을 바꾸었다.


의 사원이 되면서 인천-원산-청진-함흥에 근무하다가 해방이 되면서 다시 고향 방갈리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기, 그리고 다시 인천으로 옮겨 수산업․운수업․유류업 등을 통해 사업가로 성공하기까지로 구분할 수 있다


박채근은 19세에 인근 동리의 경주 최씨와 혼인하였고,

맏아들 상복이 3살이 되던 24세까지 고향에서 부모와 함께 농사와 어업에 종사하였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관계로 정규교육은 받지 못하였다. 교통이 불편하여 왕복 120리가 넘는 태안읍내 태안공립보통학교(태안읍 소재)까지 걸어다녀야만 했는데, 그렇다고 태안읍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다. 결국 택한 길은 3년 동안 저녁마다 친구 세 명과 함께 20리 떨어진 이곡리(梨谷里)의 서당을 다녔고, 그곳에서 천자문․동문선습․소학을 배우고,

대학까지 읽었다고 한다. 그런 연후에 개시내 자신의 집에 야학(夜學)을 열었고,

인천으로 떠나기 전까지 동네 아이들에게 언문과 한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고향에서 부모와 처자를 부양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였고,

1936 24세의 나이로 일거리를 찾아 인천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 인천은 개항장으로써 급속히 성장하면서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당시 방갈리에 이웃한 만대 포구에서는 인천을 왕래하는 기선이 기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별다른 기술이나 학력이 없었던 관계로, 인천으로 이주한 초창기에는 무척 고단한 삶을 살아야만 했으니, 셋방살이를 하면서 인천항의 부두노동자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힘겨운 부두노동을 하는 와중에도 밤에는 일본어를 가르치는 야간학원에 다녔다.

고향에서 서당을 다녔던 관계로 한문에 능통했던 그는 남들보다 빨리 일본어를 익힐 수 있었고,

2년 정도 학원을 다닌 뒤에는 일본어로 된 책을 막힘없이 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그러던 가운데 박채근은 항만하역회사였던 조선운수에서 3년에 한 번 조선인을 대상으로 임시사원을 뽑는 공채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고, 결국 이 일이 향후 사업가로서의 기틀을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당시 조선운수는 전국 주요 항만과 철도역의 운송과 하역을 전담하던 회사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거대 국영기업이었다. 박채근은 조선운수 인천지점의 임시직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였고, 근무성적이 좋아 3년 후에는 정식사원으로 승진하면서 황해도 해주지점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해방 후 월남할 때까지 함흥․청진․원산지점 등에서 근무하였다.

청진과 원산지점에 근무할 당시에는 해륙운수사(海陸運輸社)라는 회사를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해륙운수사는 조선운수의 하역업무를 주로 처리하는 하청회사였다.

 

그는 가능한 한 고향에서 많은 젊은이들을 직원으로 고용하였고, 일제의 강제징용에서 면제받을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전시 하에서 일제는 항만하역노동자들을 강제징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조선운수의 정식사원이 되면서 생활에 다소 안정을 찾았고,

고향과 멀리 떨어진 함흥으로 전근하게 되면서 고향의 부모님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도 그의 향학열은 식지 않았고, 함흥에서 그는 함남중학교(咸南中學校) 야간반을 다녔다고 한다그러나 해방으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박채근은 그 동안의 사업기반과 재산을 버리고 어렵게 태안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월남한 직후에는 남의 배를 빌려 태안군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사서 강경이나 군산 등지에 팔고, 그 대금으로 젓갈을 매입하여 다시 태안 인근에 파는 중개상을 하였다. 이 사업을 통하여 약간의 자본금을 마련하였고, 그는 다시 인천으로 옮겨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연평도에서는 조기잡이가 성행했는데, 대부분의 어선이 냉동시설을 갖추지 못한 소위 ‘풍선(風船)’이었던 까닭에 가능한 한 빨리 잡은 고기를 처분하여야만 했다.

박채근은 이점에 착안해서 동력선을 구했고, 얼음 등의 자재를 실어서 조기잡이 어선과 물물교환을 하였고, 다시 조기 등을 어업조합에 팔아서 이익을 남겼다. 박채근은 이 사업으로 많은 재산을 벌어들였다


박채근은 수산물 중개를 통하여 마련된 자본금으로, 후일 대한항공을 설립한 조중훈과 동업으로 대동운수를 설립하였다. 후일 조중훈은 한진운수를 설립하여 독립하였고, 박채근은 혼자 대동운수를 경영하다가,

 

1964년 대양석유상사(大洋石油商社)로 업종을 전환하여 유류사업에 뛰어들었다.

인천항을 출입하는 선박에 기름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그는 미군이 사용하던 유조바지선을 구입하였고, 그의 예측이 맞으면서 사세가 확장되어 대양석유상사는 3년 후 회사를 법인화하면서 동양석유주식회사(東洋石油株式會社)로 사명(社名)을 바꾸었다. 현재 동양석유주식회사는 12척의 유조선을 소유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인천항․군산항․평택항 등지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다.

(3) 태안여상의 설립과 변천
박채근은 타향에서 온갖 역경을 극복해가며 사업가로서 성공하였으나, 또한 그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사업에도 열심이었다. 특히 공식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에 한이 많았기 때문에 교육사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유달리 교육과 관련한 일화도 많은데,

인천고시학원(仁川考試學院)의 학생들이 야간학습을 할 만한 장소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에, 자신의 집 마루와 2층 거실을 1년 동안 무상으로 내어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고향의 여러 학교에 시설비를 보조하고, 각종 교구(校具) 등을 구입하여 기증하는 일은 예사였으며, 태안군 원북면의 원이중학교 부지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학교 건립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해당 주민이 자체적으로 부지를 마련하여야만 건립비용을 지원한다는 말을 듣고 사재(私財)를 털어 부지를 매입해 주었던 것이다.

현재 원이중학교에는 박채근을 칭송하는 송덕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흩어진 능력을 모아 덕성을 알게 하고
육영사업을 위해 큰 재산을 아껴하지 않고
마음 밭을 계발하여 인재를 육성하고
모두 수리 모아 함께 칭찬하여
돌비석을 높이 세우노라
1973 7
원이중학교 설립기성회


그의 교육사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1973년 태안읍 남문리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태안여상을 개교하는 것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현 태안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태안여자상업고등학교는 태안군 최초의 고등실업교육기관이자 여성교육기관이다. 박채근은 생전에 여자에게 교육기회가 적음을 안타까워하였고,

지역 발전을 위해서도 여성교육이 발전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학교설립 당시 췌장암으로 투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사업이라는 사명의식으로 태안여상의 설립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고 전한다.

건립장소, 설계에서부터 기초공사까지, 그리고 책․걸상과 기자재는 물론 조경식수까지 심혈을 기울이면서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태안여고 三十年史』(2004). 


그러나 박채근은 태안여상이 개교 후 미처 1년이 지나지도 않은 1974 12 11 57세의 나이로 타계하였고, 1975 1 9일 제2대 이사장으로 박채근의 장남 박상복 이사장이 취임하였다. 장례는 학교장으로 치러졌으며, 묘소는 학교 뒷산이다.

태안 주민들은 그의 생전인 1974 4 27일 교내에 송덕비를 세웠고,

사후인 1974 12 15일에는 묘소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송덕비 전문 >
그려도 못 다 그린 고향땅 높은 터에
생애를 기울이어 배울 자리 지으시니
높으나 높은 그 뜻을 길이 담아 전하리.
1974 4 27


< 추모비 전문 >
박채근 선생 가시다. 1974 12 11일 새벽
생전에 가꾸어 온 동백꽃 피기 전에
동호 선생 영원히 가시었네.
대망의 뜻을 품고 한양 길에 오르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