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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면] 물이 넘어온다는"무너미재" 게시판 상세보기

[태안문화원] - 지명 및 전설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소원면] 물이 넘어온다는"무너미재"
작성자 태안문화원 등록일 2016-06-14 조회 627
첨부  
 

[소원면] 물이 넘어온다는"무너미재"

소원면 송현 2구에서 의항(蛾項)의 『개목』으로 가는 중간쯤인
송현 3구의 『구먹마을』 에서 『수유동(水踰洞)』으로 넘는 나
즈막한 고개가 하나있는데 이고개가 바로 『무너미재』 고개이
다.

이 고개는 조선조 중종때 조곡을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하여 운하
를 굴착하려고 시도하였다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지금까지
도 이 지명만은 『무너미재』, 『수유동』, 『곳집재』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삼국시대나 태고시절에도 그랬겠지만 고려조때나 조선조때의 왕
실의 예산을 조곡에 의존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조곡을 지방으로부터 서울로 운반하는데 별다른 운반
시설이 없었던 옛날로서는 육로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대부분 조
운(해운)에 의하여 개성이나 한양에 운반하였다.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지역의 조곡은 현지에서 필요한 군량미
나 관원의 봉급으로도 사용하였지만,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지
방의 조곡은 대체로 해운을 통하여 운반하였다. 당시의 연간 수
송량은 대체로 10萬石 정도였으나 (조선조 초기의 미곡 총생산량
은 40萬石정도였음.) 대동법 실시이후 그 양은 26萬石 정도로 늘
어났으며, 이 조곡은 왕실의 연간 예산이기도 하였다. 조선조 효
종때 쓰여진 『반계수록』에 따르면 평시평년세미 황금합 30만
석 제 서북양계 유 본통외 6도세 26만여석 조지경(平時平年稅米
黃金合 三十萬石除 西北兩界留本通外 六道稅 二十六萬餘石遭至
京)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도 나타나있는 것처럼 서북양계를 제외한 6도의 조세
26萬여석이 조운, 즉 해운에 의하여 서울로 운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조곡을 운반하는데 있어 유명한 조운로(漕運路)가 3군
데 있었는데, 그 첫째가 안흥량(安興梁)의 관장항이었음은 두말
할 필요 조차 없었고, 두번째가 경기도 강화도의 『손돌목』, 세
번째가 황해도 장연의 『장산곳』 이었다.

그런데 전국에서 제일 험난한 관장항의 해난사고는 그 수가 엄청
나게 많았는데, 큰 규모만 간추려 보아도 조선조 태조 4년
(1395) 경기도 조운선 16척이 난파되었고, 태종 3年(1403)의 5
月 경상도 조운선 34척의 침몰과, 같은 해 6月에는 경상도 조운
선 30척의 침몰과 함께 1천명이 사망하고 1만석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태종 14년(1414) 8月에는 전라도 조운
선 66척이 침몰하여 200여명이 익사하고, 미곡 5,800여석이 수장
되었다고 한다. 다시 세조 1년(1455)에는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수장되었다고 하니 당시의 항해술로는 파도치는 시속 4노트의 해
류에서 830m의 좁은 수로를 암초에 부딪침없이 항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던가를 짐작할만하다.

해난사고는 고려때부터 계속되어 천수만에서 가로림만에 이르는
운하-태안읍 인평리에서 도내리까지-를 굴착하려고 시작하였는
데 실패하였음이 “高麗史世家 券十六 仁宗二條”(고려사세가 권
16 인종 2조)에 나온다.

즉 “由蘇泰縣境 착河道之則船行捷利遺襲發旁郡卒 數千人착之意
未就”(유소태현경 착하도지측선행첩리유습명발방 군졸 수천인
착지의 미취)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소태현경(蘇泰縣境)(지금의 태안군의 경계)에 하도(河道)
를 굴착하려고 郡의 군졸(軍卒) 수 천명을 동원하여 시도하였으
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에 대한 기록
은 한없이 많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에 가 보아도 그 자취마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하여 알 수가 없다.

결국 이곳의 운하굴착은 고려조 인종 12년 갑인 년(1134)에서부
터 시작하여 조선조 현종 10년 기유년(1669)에 이르기 까지 장
장 535년간 10여차례나 시도되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만일 이
운하가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때부터 태안군은 전체가 도서(섬)
가 되어 지금쯤은 연육교를 통하여 운행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
다. 결국 이 공사를 단념한 조정에서는 이곳에 창고를 건립하여
조곡을 보관하였다가 운반하였는데 이곳의 지명이 지금까지도
『창벌』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이 공사가 실패를
거듭하자 제2안으로 다시 운하를 굴착 하려고 시도한 지역이 있
었는데, 이곳이 지금의 소원면 송현 3구 수유동의 무너미재 고개
였다. 안흥량(安興梁)에서 내양(內羊) (안흥에서 신진도 안쪽)
쪽으로 소근만(所近彎) 해협을 따라 화도앞 통로를 거쳐 송현 2
구의 『벗앞들』 앞을 지나면 지금의 송현 3구의 『구억마을』
앞까지 배가 들어올 수 있는데(지금은 대부분 매립되어 육지로
변하였음)무너미재 고개만 굴착한다면 수유동의 바다와 연결되
어 소근진 앞으로 빠져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선
조 중종 17년 임오년(1522)에 무너미재를 다시 굴착하기 시작하
였다. 그러나 이 운하 공사도 15년간 계속 되다가 중종 32년 정
유년(1537)에 난공사로 인해 이것 역시 실패하고 말았는데, 만
일 이 공사라도 성공하였다면 지금쯤은 서부지역(의항, 모항, 파
도)은 도서(섬)가 되어 역시 연육교를 통하여 오고가고 하지 않
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실패로 돌아가자 운하를 파던 고개옆에 역시
『창벌』처럼 『곳간』을 설치하여 앞 바다로 들어오는 『조곡』
을 보관 하였다가, 뒷바다로 배가 들어오면 운송하였다고 하는
데 이때부터 이 마을은 물이 넘어올 마을 이라하여 『수유동』이
라 했으며, 운하를 파던 이 고개를 “무너미재”라 하여 오늘날
까지 전해지고 있다. 한편 곳간을 설치하였던 무너미재 옆의 조
그마한 고개는 『곳집개』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