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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면] 소근진(所斤鎭) 성(城)안 게시판 상세보기

[태안문화원] - 지명 및 전설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소원면] 소근진(所斤鎭) 성(城)안
작성자 태안문화원 등록일 2016-06-14 조회 580
첨부  
 

[소원면] 소근진(所斤鎭) 성(城)안

고려 때부터 오근이포(汚斤夷浦)라는 이름으로 내려오던 이 어촌
의 포구는 소원 지역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졌으며, 조
선조 태종 4年(1404) 소근진(所斤鎭)으로 개칭한 것이 오늘날의
소근(所斤)이 되었다. 그후 왜구의 침입이 심하자 이를 막기위하
여 조선조의 세조 12년(1467) 소근포진 (所斤浦鎭)이 되어 『좌
도수군첨절제사』를 두어 『당진포만호 (唐津浦萬戶)』, 『파지
도만호 (波知島萬戶)』, 『안흥량만호 (安興粱萬戶)』를 관할하
였는데, 조선시대의 관직표(官職表)에 의하면 『좌도수군첨절제
사』는 외관직으로서 종삼품의 직위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만
호첨절제사(萬戶僉節制使)가 종4품 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직위의 무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전국지리지에 기록된 태안군편을 소개하면 『동지 서산군
계 12리 (東至瑞山郡界十二里)』, 『남지 동군계 육십오리 (南
至 同郡界 六十五里)』, 『서지 소근포 삼십삼리 (西至 所斤浦
三十三里)』, 『北至 瑞山郡界 十七里 (북지 서산군계 십칠
리)』, 『거경도 사백삼십구리 (距京都 四白三十九里)』라고 표
시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태안군의 동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은 서산군과 경계를 하고 있으며, 서울의 거리는 439리에 달
한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특별한 지명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쪽만은 『소근포 33리』 라고 『소근포 (所斤浦)』라
는 지명을 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종 13년(1413)에 실시
된 행정구역개편시에도, 충청도의 서쪽으로는 태안의 『소근포』
에 달했다라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당시의 충청도의 서쪽
또는 태안군의 서부지역을 대표하는 지명은 다름아닌 『소근포』
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조선조 중종 9년 정덕갑술 (1514)년에는 둘레 2,165자 높
이 11자의 돌로된 『성 (城)』을 그 휘하에 있던 당진포(唐津
浦) 및 파지도(波知島)의 『만호첨절제사』들이 와서 축성하였
다.

정덕 병자년 (1516)에 쌓아진 파지도성은 그 2年후에 쌓아진 것
으로 소근성을 완성시켜 놓고 돌아가서 쌓은 것으로 추축된다.

효종 6년 (1655)에 완성된 안흥성보다는 무려 141년 전에 쌓아졌
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볼때 『소근성』은 분명 오랜 역사와 전통
을 갖고 있는 성이지만 중간의 관리부실로 인하여 지금은 그 자
취만 남아있을 뿐 허물어져 없어졌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지역 만은 지금까지도 『성안 (城안)』 이라고 부르
고 있는데, 옛날의 성터에는 동문 (東門)만 남아 있을뿐 나머지
지역은 대나무와 소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조금 남은 옛
날의 모습조차도 조금씩 감추어 지고 있다. 城안에는 당시 『진
보 (鎭堡)』에서 사용하던 우물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는데, 1973
年 4月 5日 마을 사람들이 시멘트로 보수(補修)하여 지금도 공동
우물로 사용하고 있다.

城주변의 해변에는 당시 심었던 것으로 보이는 수 백년 된 고목
들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자라고 있는데 그 옆으로 버스들이 지나
다니는 도로가 개통되었으며 부질없는 인사들이 분재 등으로 캐
가버려 그 모습조차도 점점 훼손되고 있다. 당시 관리들이 거주
하던 대지(垈地)는 대부분이 농경지로 변하여 계단식 밭이 되었
으며, 일부는 주택으로 옛날의 명맥을 아직까지도 이어오고 있
다.

정봉임씨가 살고 있는 집터 뒤편이 당시 첨사의 청사자리로 알려
지고 있다. 아울러 성의 동쪽에는 『풀무골』이라는 지명이 지금
까지도 전해지고 있는데 큰 풀무골과 작은 풀무골로 구분되고 있
다.

그런데 이 풀무골에서는 옛날에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풀무
질』을 하였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는데, 지금도 이
곳의 흙을 파보면 검은 흙이 나오고 있으며, 이따금씩 『활촉』
등도 발견된다고 한다. 아울러 이 성의 서쪽으로는 『풍구재』라
는 지명이 역시 지금까지도 전하여지고 있는데, 싸움에서 승리
를 하였거나 경사스러운 일이 발생 하였을때 풍악을 울려 풍류놀
이를 하였다고 하여 『풍구재』라고 전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城안에는 고종 19년(1882)까지 『좌도수군첨절제사(첨사)』가 주
둔하였으나, 군편제 개편에 따라 철수하였고, 고종 32 년(1895)
에 시행한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소근면(所斤面)으로 격하 되었
다가, 그나마 1914年 행정구역 폐합시 소원면에 흡수되어 지금
은 조용한 농촌의 한 마을로 변모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