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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면] 만리포의 옛 이름 "만리 장벌" 게시판 상세보기

[태안문화원] - 지명 및 전설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소원면] 만리포의 옛 이름 "만리 장벌"
작성자 태안문화원 등록일 2016-06-14 조회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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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면] 만리포의 옛 이름 "만리 장벌"

조선 조 때는 중국과의 친교가 두터워 조선에서는 중국을 대국으
로 섬겼고, 중국에서도 조선을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렀기 때
문에 양국간에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칙사
들은 대국이라는 자존심만을 앞세워 극진한 대접을 하지 않으면
행패가 심하였다고 한다. 이들이 내왕하는 통로는 대부분이 육로
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해상을 통하여서도 내왕 하였는데, 그 해
상통로의 하나가 안흥에 상륙하여 태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태안에 들어 와서는 경이정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하는데, 『경
이』란 항해하는 사신의 편안한 운항을 기원한다는 뜻으로 세웠
다고 한다.

이때의 안흥이란 지금의 안흥땅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외로도
서해안의 무명지역은 전부 『안흥』으로 표현했던 것으로 추측된
다. 그런데 조선조 세종 때, 명나라의 한 칙사는 해상을 통하여
안흥에 상륙하고자 하였으나, 풍랑의 영향에 의해 지금의 의항
리 2구 지역에 상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그를 환영하기 위
하여 밭고개의 『꽃게』와, 막동(幕洞)의 『조기』, 그리고 모항
의 『해삼과 전복』을 대접 하였는데, 이를 맛본 이 칙사는 생선
의 맛에 탄복하였던지 『조선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습니
까? 이곳의 경치는 참으로 감탄스럽군요.

저쪽 저산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하는 등 능청을 계속 떨
다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 갈 때도 이곳으로 가도록 하겠소』
라고 말하고는 태안의 『경이정』을 거쳐 상경하였다고 한다. 임
무를 마친 이 칙사는 돌아 갈때도 이곳을 통해 돌아가겠다고 고
집하여 결국 해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아름답고
잔잔한 모래 장벌 지금의 『만리포』에서 칙사가 좋아하는 『조
기와 꽃게, 그리고 해녀들이 잡아오는 해삼과 전복을 대접하면
서, 맹사성 주관하에 수중만리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전별식』
을 가졌다고 한다. 이때 칙사는 기분이 좋았던지 해삼과 전복을
잡아오는 해녀들을 보고는 『조선에는 여자들도 진실되고 아름답
군요』 하면서 한없이 술을 마시고 돌아갔다고 한다. 칙사가 기
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본 『맹사성』은 자신도 기분이 좋았던
지, 해녀들이 해삼과 전복을 잡던 해변이름을 『진녀 (眞女)』
라 부르도록 하였는데, 후에 이말이 『지녀』라고 변하였다 한
다.

(이 지녀라는 이름은 조수에 따라 물이 빠졌을때 바다와 육지의
길이가 한없이 길어 『긴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지녀로 변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하튼 이때부터 이곳의 이름은
『지녀』라고 불려지고 있으며, 지금도 각종 해산물과 해삼^전
복 등이 많은 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칙사가 입항할
때 환영한 곳을 『환영섬』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이 말이 변하
여 『화영섬』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화영섬』 옆에 배를 정박
하였던 곳은 배를 세웠다 하여 『섯배』로 부르다가 지금은 이말
도 변하여 『선배』라 부르고 있다. 또한 칙사가 돌아갈 때 전별
식을 가졌던 백사장은 『수중만리 (水中萬里)』란 뜻에서 『만
리 (萬里)』란 말을 따 『만리장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
다. 그후 몇 백년이 지난 조선조 말엽의 어느날 풍수지리에 밝
은 이지영이란 지관이 이곳을 지나다가 만리장벌의 모래밭에 쉬
면서 『여기에는 앞으로 만호(萬戶)의 집이 들어서겠구나.』 라
고 예언을 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이 지관의 말을 믿지 않고 『광
인』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지영의 예언이 정확하였다
고 주민들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이 만리장벌은 오늘날 전국에서 제일 가는 해수욕장 만리포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