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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면] 이태백이 놀던 곳 "태배" 게시판 상세보기

[태안문화원] - 지명 및 전설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소원면] 이태백이 놀던 곳 "태배"
작성자 태안문화원 등록일 2016-06-14 조회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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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면] 이태백이 놀던 곳 "태배"

태배란 지명(地名)을 말함인데, 소원면 의항리 2구에 있다. 이
의항은 순 우리 말로 『개미목』인데 그동안 수 십 년 내려 오면
서 개미가 개로 줄고 목이 묵으로 와전되어 지금은 개묵이라 부
르고 있다. 이 지형이 마치 개미목같이 생겼다 하여 개미목이라
고 부르던 것이 개묵으로 변했으며, 이 개미묵을 한자어로 표기
하면 의항(蛾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묵의 뒷편에는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 산이 개묵
의 진산이다. 이 산너머에는 서북(西北)쪽으로 약 45 미터쯤 되
는 아늑한 해안이 있는데 이 곳을 속칭 태배라고 부른다. 이 태
배의 해안에는 고운 은모래가 곱게 깔려있다. 또한 바닷물이 빠
져나가면 아래 쪽에 바다돌이 드러나는데, 이 곳에는 게와 고
둥, 굴, 그리고 각종 해조(海藻)가 많아 이를 채취하는 부녀자들
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화창한 봄날이면 산기슭에 흐
드러지게 피어 있는 진달래꽃과, 해안가에 곱게 깔려 있는 은모
래가 잘 조화를 이루어 더욱 아름다운 절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비록 시인이 아닐지라도 저절로 한
구절의 시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경승지이다.

더구나 해안가 산 밑에는 커다란 자연석이 우람하게 서 있는데
크기는 가로 3.2미터, 세로 2.3미터로서 전면이 비교적 편편하
며 이 곳에 한시가 쓰여져 있다.

이 한시는 옛날 중국 당나라의 시선 이백(李白=자는 太白)이 이
곳에 와서 아름다운 절경에 도취되어 암벽에 써 놓은 것이라 전
해져 왔다.

그리하여 처음 이곳 지명을 태백이라고 하였는데, 수 백년 내려
오면서 태백의 백에서 ㄱ(기역)이 탈락되어 지금은 태배라 부르
게 된 것이라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칠언 시가 두 편, 오언
시가 한 편, 모두 3편의 한시로 되어 있는데, 이중에 칠언 시에
는 시작자의 설명과 연월일이 뚜렷하게 남아 있으나, 오언 시에
는 그것이 완전히 지워져서 보이지 않는다. 시의 내용 중에는 이
미 소멸되어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시의 흐름과 전후 관계
등을 참작하여 결자를 나름대로 보완하여 해독하면 그런대로 시
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는 이태백이 지은 시가 아님이 분명한 것 같다. 이
백이 이 곳에 와서 시를 지었다면 이를 실증할 수 있는 무엇인
가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물증이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태백이 우리나라에 다녀갔다는 기록도 없
다. 이백은 당나라 중엽의 시인이다.

즉 두보(杜甫)와 아울러 중국 최대의 시인으로서 시선이라고 하
였는데, 자는 태백이요 호는 청련 또는 취선옹(醉仙翁)이라고도
하였다.

이백은 본래 천성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한 천재적 시인이었다.
이백의 시풍을 짐작해 볼 때 개묵의 태배 암벽에 쓰여져 있는 시
는 이백의 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조선조의 영 정조
때에 쓰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영 정조 때는 실학의 극성기로서 이때에는 탕평책을 써서 널
리 인재를 등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정조는 학문 연구소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많은 실학자를 등용하였는가 하면, 특별히 서
얼 출신의 학자들을 채용하여 학문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이 때는 경향 각지에서 학문의 열기가 높아 가고 있을 때였으므
로 시골에서도 선비(儒生)들이 학업에 열중하다가 좀 쉬기 위해
바닷가 경승지를 찾아 이곳 태배에까지 와서 놀다가 유흥과 절경
에 취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암벽에 시를 남긴 것으로 보는 것
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첫번째 시의 시작일(詩作日)은 신사(辛巳) 4월 5일이다.

이 신사년은 서기 1791년(영조37)이니, 지금으로부터 246년 전이
다.

또한 두번째 시는 경자(庚子)3월 기망(旣望)에 신산우가 지은 것
으로 되어 있는데, 이 경자년은 서기 1780년(정조4)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이기종이 지은 첫번째 시보다 19년 뒤에 지은 셈이 된
다.

그리고 마지막 5언시는 시작일(詩作日)이 없어서 언제 작품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세편의 시를 볼 때 모두 산에 진달래꽃이 활짝 피는
봄철임을 알 수 있으니 이는 분명히 글을 읽는 국내 선비들이 봄
철에 꽃놀이를 왔다가 남긴 시임이 틀림 없을 것 같다.

또한 이 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번에 세 사람이 쓴 것이 아니
라 우선 선학(先學)인 이기종(李起宗)이 이 곳을 다녀간 19년 뒤
에 후학(後學)인 신산우(申山雨)가 춘경(春景)이 좋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이 곳에 와서 시를 남긴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 시는
시작일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5언시의 내용으로 보아 신산우와 같은 날이 아님을 알 수 있
다.

이와 같이 3편의 시를 분석해 볼때 3사람의 작자는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마지막의 5언시를 보면 봄철의 정경을 그대로 잘 묘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스승은 어느 철에 다녀갔는지 문생들이
경승지를 찾아오니 3월의 진달래꽃 활짝 웃고 봄 바람은 운산을
메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