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남이흥(南以興) 1576(선조9) - 1627(인조 5) | ||||
---|---|---|---|---|---|
작성자 | 당진문화원 | 등록일 | 2004-07-08 | 조회 | 471 |
첨부 |
![]() |
||||
|
|||||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의령, 자(字)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이니 부는 목사 유(瑜)이고 모는 전주류씨다. 1598년 (선조 31)정유재란때 노량해전에서 아버지가 적탄에 맞아 전사한 데 충격을 받아, 글공부를 중단하고, 궁술(弓術)과 기마(騎馬) 에 전념하여 1602년(선조35)무과에 급제하였다. 평안도병사로서 영변부사를 겸임하여 국경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1627(인조 5)정 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주성에 나아가 후금(청)의 군대를 저 지하려 하였다. 이때 후금의 주력부대 3만여명이 의주를 돌파하 고 능한산성을 함락한 뒤 안주성에 도달하였다. 이에 목사 김준 (金埈), 우후(虞候) 박명룡(朴命龍), 강계부사 이상안(李尙安)등 을 독려하여 용전하다가 무기가 떨어져 성이 함락되자, 그는 "조 정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고 기를 수 없게 하 였는데 강한 적을 대적하게 되었으니 죽는 것은 내 직책이나 다 만 그것이 한이로다"라고 하며 적을 성안으로 유인하여 화약고 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자폭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는 좌의정 을 추증하고, 의춘부원군을 추봉하였으며 불천지위(不遷之位:나 라에 공을 세워 영원히 제사를 받들다)가 내려지고 충장(忠壯) 의 시호와 충진정려를 내렸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그가 최후를 마친 안주에 충민사를 지어 제향토록 하였다. 사당인 충장사와 유물관인 모충관과 묘소와 신도비가 대호지면 도이리 1구에 있는데 그의 유품은 중요민속자료 제 21호로 지정 되었으며, 매년 9월 "충장공 남이흥장군 숭모제"가 이곳 충장사 경내에서 거행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