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맹사성(孟思誠) 1360(공민왕9) - 1438(세종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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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당진문화원 | 등록일 | 2004-07-08 | 조회 | 4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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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초의 명상(名相)으로 호는 고불(古佛)이며,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고려 말 공민왕 9년(1360) 개경(개성) 근교에 서 수문전(修文殿) 제학(提學)인 희도(希道)으 l아들로 출생했으 니 후일 최영장군의 손자 사위가 되었다. 그는 5 - 10세 사이에는 충청도 한산에서도 살다가 현재의 충남 아산군 배방면 중리 행단(杏壇)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부친과 친 교가 있는 권근(權近)의 문인인데 우왕 12년(1386) 문과에 급제 한 후 충추 관검열, 전의시승(典儀侍丞), 기거랑(起居郞), 사인 (舍人), 우헌남(右獻남) 등을 역임하고 조선 건국후에는 이곳 면 천지군사(沔川知郡事:군수), 수원판관, 예조의랑, 이조참의 등 을 거쳐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그는 문신(文臣)으로서는 최초로 오군도진무(五軍都鎭撫)가 되었으며, 궤장( 杖)을 하사받았다. 1431년 좌의정에 올랐으며 다음해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를 겸 하여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하고, 1435년 치사(致仕:나 이가 많아 벼슬을 내놓고 물러남)하였다. 황희와 함께 조선 초 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 아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집에 비가 새고, 고향에 왕래할 때 남루 한 차림으로 행차하여 그곳 수령들이 잘못알고 야유했다가 나중 에야 알고 도망치던 중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뒤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 또는 침인지(沈忍池)라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조예가 깊어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스스로 악기를 제작하였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 고 아산군 배방면에 효자 정문이 세워져 있다. 시호는 문정(文 貞)이다. 그가 이곳 면천지군사 재임시, 그 은택이 백성에게 미 친 바 있어, 지금까지도 그를 칭송한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 람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