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익필(宋翼弼) 1534(중종 29) - 1599(선조 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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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당진문화원 | 등록일 | 2004-07-09 | 조회 | 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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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峰) 또는 현승(玄繩)인데 그의 호를 구봉이라 한 것은 그 가 경기도 고양군 구봉산 아래에서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초시 에 한번 응시한 이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 이 높았다. 이이, 성혼 등과 함께 성리학의 심오한 이치를 논변 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西人)세력의 막후 실력 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년(선조 19) 동인(東人)들의 충 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 이 밝혀지고 그의 형제들을 포함한 안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 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바꾸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 다. 당시 그는 충청도 면천군 마양촌(현재 당진군 송산면 매곡 리 마양이) 친구 김진려 집으로 은신하여 기숙하고 있었다. 그 후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死)로 정여립·이발 등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그 뒤 또 조헌 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의 미움을 받아 동생 한 필과 함께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후인 1593년(선조 26) 사면으로 석방되었으나 일저안 거처 없이 친구·문인들의 집 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가 1599(선조32) 66세를 일기로 세상 을 떠났으니 그가 운명한 곳은 면천군 마양촌 친우 김진려의 집 이었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스스로 고대(高大) 하게 행세하였고, 아무리 고관·귀족이라도 한번 친구로 사귀면 자(字)로 부르지 관(官)으로 부르지 않았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구봉집(龜峰集)이 전하며 1750년(영조26) 홍계희(洪啓禧)의 청포 증장(請褒贈狀)에 의하여 그 2년 후(1752) 사헌부 지평(持平)의 증직(贈職)과 문경(文敬)이란 시호가 내려져 오랜 기간 신분 제 도의 멍에가 벗겨졌다. 그의 묘소와 사당(입한재)과 묘비가 당진 읍 원당리에 있으며 제향은 매년 묘소에서 후손들의 묘제와 입핸 재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 당진 유림대표들이 거행하는 제향 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