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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익필(宋翼弼) 1534(중종 29) - 1599(선조 32) 게시판 상세보기

[당진 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송익필(宋翼弼) 1534(중종 29) - 1599(선조 32)
작성자 당진문화원 등록일 2004-07-09 조회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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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峰) 또는 현승(玄繩)인데 그의 호를 구봉이라 것은  

경기도 고양군 구봉산 아래에서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초시 

한번 응시한 이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 

높았다. 이이, 성혼 등과 함께 성리학의 심오한 이치를 논변 

하였고, 특히 예학(禮學)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西人)세력의 막후 실력 

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선조 19) 동인(東人)들의  

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 

밝혀지고 그의 형제들을 포함한 안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바꾸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 

. 당시 그는 충청도 면천군 마양촌(현재 당진군 송산면 매곡 

마양이) 친구 김진려 집으로 은신하여 기숙하고 있었다

1589(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死) 정여립·이발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조헌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의 미움을 받아 동생  

필과 함께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후인 1593(선조 

26) 사면으로 석방되었으나 일저안 거처 없이 친구·문인들의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가 1599(선조32) 66세를 일기로 세상 

떠났으니 그가 운명한 곳은 면천군 마양촌 친우 김진려의  

이었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스스로 고대(高大

하게 행세하였고, 아무리 고관·귀족이라도 한번 친구로 사귀면 

() 부르지 ()으로 부르지 않았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구봉집(龜峰集) 전하며 1750(영조26) 홍계희(洪啓禧) 청포 

증장(請褒贈狀) 의하여 2 (1752) 사헌부 지평(持平) 

증직(贈職) 문경(文敬)이란 시호가 내려져 오랜 기간 신분  

도의 멍에가 벗겨졌다. 그의 묘소와 사당(입한재) 묘비가 당진 

원당리에 있으며 제향은 매년 묘소에서 후손들의 묘제와 입핸 

재에서는 매년 음력 10 1 당진 유림대표들이 거행하는 제향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