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부성산성

부성산성

소개

주소 :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 산86-3번지 일원

내용

1) 현황

이 성은 가로림만의 중간부에 위치하여 남으로는 지육현의 현청 터로 알려진 마을과 연접되어 있고 북으로는 바다와 직면하여 백제가 공주, 부여로 천도한 후 대중교섭의 창구역할을 한 곳이 아닌가 생각되는 곳이다. (이하는 공주대 이남석 박물관장의 조사보고서에서 추린 것)

2) 성곽의 규모
이 성의 크기는 성벽의 둘레가 490m으로 백제 산성으로는 적지 않은 규모이다. 쌓은 형식은 편축식(片築式)이며 산의 정상에서부터 중턱까지 내려오는 삼태기형으로 대부분의 산성과 별다른 점은 없다. 성곽은 대부분 훼손되어 형태만 짐작할 수 있는 곳이 많다. 성문은 전부 확인할 수는 없으나 동, 서, 북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남문은 없고 다만 낮은 곳이기 때문에 성내의 물을 배출 할 수 있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내에는 평탄면이 많아서 건물지가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네 곳에 기와, 토기편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집단 건물지로 인정된다. 그 중 정상부에 있는 것은 직경 25m 정도의 원형으로서 다듬은 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지가 틀림없다. 정상부에 있는 만큼 사방을 감시하는 기능이나 의식을 행하던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곳에서 10m정도 내려온 곳에도 10~15m 넓이의 평탄면이 있고 남벽 안쪽 역시 넓은 평탄면이 있는데 현재 2동의 건물이 있다. 북쪽에 있는 것은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3) 출토 유물 분석
성내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기와편과 토기편이 대부분이며 기와편은 평기와가 중심을 이루고 토기편은 각종 용기들이다. 시대별로는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조 것이 있다.

 

(1) 백제시대
가. 기와류
양적으로 볼 대 절반정도나 된다. 판단기준은 태토와 문양, 제작 상에 나타나는 모골의 형태나 측면 와도의 사용방식 등으로 판단하였으며 암, 숫기와가 혼재하나 막새기와는 수습되지 않았다. 문양이 있는 것은 가는 선조문, 태선문이 대부분이며 색조는 회청색, 흑색, 회색이다. 측면의 절단은 내외면 에서 완전하게 자르면서 양쪽 모서리를 다듬은 것이 많다.
나. 토기류
토기류는 개배와 용기의 다리편, 호편 등이다. 개배는 뚜껑과 용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체로 흑청색에 소성도가 높은 경질이다. 용기의 다리편은 마치 향로의 다리편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파수편 한 점은 길이 6.3m정도로 태토가 매우 거친 갈색의 연질토기인데 파수의 상단에 직선의 홈이 깊게 패여 있다. 이외의 토기편은 대체로 호의 동체 및 구연편이다.
 

(2)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기와편과 토기편이다. 기와는 문양에서 백제시대 것과는 다른 문양 및 제작형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고 토기는 형태나 문양 및 기형에 따라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는데 어렵지 않은 것들이다.
가. 기와류
대체로 문양에서 큰 격자문, 사격자문, 불규칙한 격자문, 어골문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포목문은 거의 확인이 어렵다. 소성도는 비교적 높은 것으로 연한 갈색의 것에서 회청색, 흑회색 등 다양한 색조를 나타낸다. 태토가 비교적 투박하면서 기와의 두께도 두텁다. 암기와와 숫기와 모두 배면에 포목문 자국이 남아 있는데 약간 거친 것이 많고 일부는 모골 자국도 있다. 특히 측면의 집단은 와도로 내면을 한번 절단한 흔적을 남긴 것이 많다.
나. 토기류
토기중에 주목되는 것은 신라의 전형적 원점문이 시문된 것으로 소성도가 매우 높은 것이다. 기형은 드림새와 그릇받침 턱이 있으나 복원이 어렵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점은 소성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회청색조를 띄고 받침 턱이 있으며 여기에 짧고 낮은 드림새가 있는 것이다.
 

(3) 고려시대, 조선조
많지는 않지만 고려시대의 청자편 조선조의 백자편도 있다.

4) 부성산성의 성격
이 성은 우리 나라 고대산성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을갖췄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발굴 조사가 안되어 시대 검토는 성내의 수습 유물만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으며 성격에 대해서는 역시 유물 중심으로 시기를 판단하고 입지나 형상을 근거로 하여 고구(考究)할 수 있을 것이다. 수습 유물로 판단할 때 이성의 초축 시기나 사용된 시기는 백제의 후기 즉 웅진 도읍기 이후의 시기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기와류의 출토가 많다는 것은 성내에 조영되었던 시설들이 백제가 멸망한 후 통일신라시대에도 여전히 그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충남 지역은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다음 새로운 방어체계를 마련하기 위하여 축성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 성도 이러한 환경에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특이한 점은 서쪽에 치우쳤다는 점, 바다에 직면하였다는 점이며 방어성이라면 연결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성이 유일하다는 점, 치소의 현성이라면 각종 생활 유적이 연계되어야 한다. 예로 고분 같은 것 등인데 이런 것이 없다. 또 당시 기와는 치소나 사찰 등 특수 건물에만 사용되었는데 건물지마다 발견되었다는 점등으로 부성산성은 단순한 방어성이나 치성이 아니라 특수 목적성으로 보인다. 웅진 도읍기 이후는 국가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대 중국 교류가 활발했었는데 한강변을 잃고 마땅한 항구를 이곳에서 찾았을 것이다. 이 산성 바로 밑에는 닷개라는 포구가 있어 이 항구를 이용하고 육지 쪽으로 대륙 교통 전초기지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