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나성
내용
사적
소재지 :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 565 외
이 성은 왕성을 둘러 싸고 있는 외곽성을 말한다.
축조시기는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긴 538년 전후로 추정된
다. 삼국시대 최초의 나성으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성의 둘레는 약 8킬로미터인데 백마강이 흐르는 서남북 지역
을 제외한 부여 시가지 전체를 반달 모양으로 감싸고 있다. 부
여에서 논산 방면으로 통하는 능산리, 한산쪽으로 나아가는 길목
인 동남리, 그리고 공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각각 동문·서
문·북문이 있었으며, 요소마나 초소와 사이문이 있었다. 최근
의 발굴조사 결과 흙으로 쌓은 토성임이 밝혀졌다.부소산성을 기
점으로 하여 동남쪽으로 우회하는 한 갈래와 서남쪽으로 도는
한 갈래가 있다. 동남쪽 나성은 길고 서남쪽은 짧다. 전체길이
는 약 8km에 달한다. 남쪽은 백마강에 면하고 있으므로 나성이
축조되지 않았으며 내부에는 부여 시가지와 금성산, 그리고 적
지 않은 면적의 농경지가 포함된다.
나성은 구릉을 이용해서 축조된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을 수
있다. 동쪽 나성은 높은 구릉 위에 위치하고 서쪽 나성은 백마강
을 따라 낮은 구릉 위에 축조되었다. 구릉과 구릉 사이에서 평지
를 통과하는 부분이 3개소가 있는데 지금은 시가지 개발과 농경
지 조성으로 평지 나성은 모두 파괴 멸실되었다. 그러나 구릉에
축조된 나성은 옛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부소산성의 좌우 양편에서 시작하여 구릉의 능선을 이용하여 축
조되어 있지만 동북쪽 모서리에는 청산성(靑山城)을 경유 , 동남
쪽으로 방향을 돌
리게 된다.
출입문으로는 동문과 서문이 있다. 서문지로 추측되는 곳은 백제
대교 지점에 인접해서 발견되었다. 문지의 외부에는 호안석축이
축조되어 그 높이가 1.5m가량 되며 장방형 석재들을 사용하여 정
연하게 축조되었다. 성문의 너비는 9.5m이다.
동·서 2개의 성문 이외에 구도읍인 웅진에서 들어오는 동북문과
부소산 기슭에 위치한 고성진(古省津)(현재의 구드래나루)에 이
르는 서북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 자리는 확인하기가
힘들다. 고성진은「구드래」라는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대중(對中)·일(日) 외항선박들이 도착할 수 있는 중
요한 선착장이었다고 생각된다.
나성의 구조는 호성석축(護城石築)이 있는 토축성벽이지만 그 축
조방법은 부분에 따라 적지 않은 차이가 보인다. 왕릉 남쪽으로
평지를 지나 건너편인 필서봉(筆書峯) 북록의 낮은 구릉에서 조
사된 바로는 호성석축(護城石築)의 높이는 2.5m, 성벽 전체의 높
이는 4.9m, 기저부의 넓이는 약 16m로 조사되었다.
평지 나성의 구조는 내부의 구축방법에서 산성과는 다른 제방축
조술을 응용하였다. 내부의 토층 사이사이에서 흑색탄화목층이
발견되었다. 이 탄화목층(炭化木層)에는 직경이 5∼10cm 내외의
참나무 등의 나뭇가지가 수평으로 배열되어 있었는데 50cm 정도
의 성체(城體)의 흙과 교대로 반복해서 깔려 있었다. 지정면적
은 634,056㎡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