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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성

증산성

내용

사적


소재지 : 부여군 규암면 신성리 88 외

백제의 도성을 방어하는 중요한 성의 하나이다. 부여에서 4킬
로미터 떨어져 있다.
해발 140미터 되는 산의 8부 능선을 따라 돌을 쌓아 만들었
다. 둘레는 약 600여 미터에 달하고, 높이는 2∼3미터 가량 된
다. 서·남·북 3개소의 성문터와 우물터 등이 남아 있다.
산 위 8부 능선을 따라 쌓은 모습이 마치 시루와 솥의 접합부
에 붙이는 시루번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증산성이라 한다. 성
안에서 백제 시대의 기와 및 토기 조각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백
제시대의 성으로 추정된다.
증산성은 사비도성의 북쪽 외곽을 수비하기 위하여 축조한 산성
으로 표고 159.8m의 산정을 에워싸서 마치 시루테를 두른 듯한
모습으로 축조된 둘레 약 600m의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지형은
서고동저의 형태로 산정상부가 서벽쪽에 치우쳐 있다. 산성의 서
쪽 성벽은 약 2∼3m 정도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잔존하고 있다.
성체의 외부는 석축하고, 내부는 내탁하였으며 삭토된 내호로 보
이는 통로가 형성되어 있다. 성의 북쪽으로 북문지가 있으며 문
지 너비는 4.3m이며, 문지의 양 측벽은 4∼5m 정도로 두텁게 육
축하였다. 동벽은 붕괴가 심하여 남아 있는 부분이 거의 없는 상
태이다. 수구도 동벽선상에서 찾아야 하나 붕괴가 심하여 확인하
기가 어렵다. 남벽내의 평탄한 대지에는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
로 추정된다. 한편 우물지는 성내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자리하고 있는 민가의 우물이 본래의 우물지내에 함께 축조되어
있다. 이 산성은 백제 수도를 수비하기 위한 북방의 외곽성으로
은산면의 이중산성, 서쪽의 옥여봉산성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증산성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부여현의 서쪽 14리에 있는 석성으로 둘레가 1,269척이며 그 안
에 우물 1곳이 있었으나 지금 폐하였으며 고소성이라고도 한다
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가 672년
(문무왕 12년) 정월에 장병을 보내 백제 고소성은 쳐서 이기고,
2월에 다시 백제 가림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하여,
이 고소성을 백제 부흥군이 최후까지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