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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정림사지

내용

사적 


소재지 : 부여군 부여음 동남리 254외

이곳은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긴 직후에 세운 절터이다. 백
제시대의 전형적인 1탑식 가람이나 백제시대 절 이름은 알 수 없
다. 1082년에 만든 기와에「정림사」라는 명문이 있어 고려시대
의 절 이름이 정림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을 배치하고 주위를 회
랑으로 둘러친 형태이다. 가람중심부를 둘러싼 회랑의 형태가 북
쪽에서 간격이 넓어진 사다리꼴이라는 점, 그리고 중문 남쪽에 2
개의 사각형 연못과 남문터가 있는 점 등이 배치의 특징이다.
강당터에 있는 석불좌상은 고려 때 절을 고쳐 지으면서 만든
것으로, 백제시대의 강당터를 고려시대에는 금당으로 이용하였음
을 알 수 있다.
남에서부터 중문·석탑·금당·강당이 일직선상에 세워지고 주위는
회랑으로 구획된 백제의 사찰이다.
해방 전에 실시된 1차 발굴조사 결과 1탑 1금당식의 전형적인 백
제절터로 밝혀진 바 있으며, 고려시대 명칭이 정림사였음이 알려
졌다. 그 후 1979∼80년, 1983∼84년에 걸쳐 충남대박물관이 전
면적인 조사를 실시하였다.
중문지는 석탑 중심에서 남쪽으로 19.98m의 거리에 중심을 두고
자리잡고 있으며,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금당지는 석탑 중심에서 북으로 26.27m의 거리에 위치하였으며
하층기단의 경우 정면 7칸, 측면 5칸이고, 파괴된 상층기단은 정
면 5칸, 측면 3칸으로 추정된다. 금당은 백제식의 이층기단으
로, 상층기단 상면은 물론 하층기단에도 초석을 배치하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강당지는 그 중심이 금당의 중심에서 31.70m 북
쪽에 위치하였으며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고려시대에 재건되었
다. 석불이 안치된 연화대좌는 이 때 재건된 기단 위에 구축되었
음이 확인되었다. 그 후 강당복원을 위한 사전조사중 백제때의
기단부도 확인되었다.
회랑지에서 남북을 통과하는 남북중심선을 상정하였을 때 가람
남북기준선에서 동쪽으로 22.50m 지점에서 동회랑이 통과하며 서
쪽으로 22.57m의 지점에서 서회랑이 통과하였다. 북회랑은 강당
측면의 중앙칸 후반부에, 그리고 남회랑은 중문 측면에서 약간
후방으로 기울어진 위치에 연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석탑에 관한 조사에서는 기초부가 상중하 3부분으로 된 판축토
에 의하여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외에 사찰 동북부에서 문지, 건물지, 배수구 와적층이 발견되

었고, 중문 밖에서는 방형의 연지와 남문지가 확인되었다.